건물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헐려…"이전하면 복원 통해 역사성 회복해야"
청와대는 역사적으로 경복궁 후원…"고종이 창덕궁 본떠 조성"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용산이나 광화문에 새 집무실을 두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면서 기존 대통령 관저와 업무 공간이 있는 청와대 부지의 역사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윤 당선인은 지난 1월 대선 후보 시절 "청와대 전체를 국민들께 돌려드리겠다"며 의견을 수렴해 청와대 활용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를 역사관이나 시민 공원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청와대 자리는 본래 경복궁 북쪽 후원으로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렸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건물들이 헐렸고,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선 뒤 100년 가까이 최고 통치자가 사실상 전유하는 공간이 됐다.

17일 학계에 따르면 청와대 부지는 고종 재위기 경복궁을 다시 짓는 과정에서 후원으로 새롭게 조성됐다.

경복궁 중건 당시의 배치도인 '북궐도형'과 '북궐후원도형'을 보면 청와대 권역에는 오운각, 융문당, 융무당, 경농재 등이 있었다.

오운각은 휴식 공간이었고, 융문당과 융무당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군사 훈련을 했다.

경농재 주변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답이 있었다.

그중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서울에서 종교시설로 사용됐고, 지금은 전남 영광에 있다.

하지만 후원의 다른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정우진 박사는 고려대 대학원에 제출한 '조선시대 궁궐 후원 체제와 운용 양상' 논문에서 창덕궁과 경복궁 후원을 국가 행사 장소, 농경지, 정치적 근거지, 휴식 공간 등 기능 측면에서 비교했다.

고종이 조성한 경복궁 후원은 창덕궁 후원처럼 남쪽에 정치적 공간을 두고, 북쪽은 임금을 위한 사적 공간으로 활용됐다.

정 박사는 "고종은 창덕궁 후원 춘당대를 모방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바깥에 경무대를 조성했다"며 "농업이 국가 경제 근간이던 조선은 권농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후원에 농경지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복궁 후원 북쪽에도 경치가 수려한 창덕궁 북쪽 옥류천과 같은 별도 정원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정 박사는 "고종 연간 경복궁 후원 백악산 자락의 계류 주변에서는 수경 시설이 정비됐고 옥련정, 오운각, 벽화실 같은 건물이 건립됐다"며 "'천하제일복지천'(天下第一福地泉)의 독특한 수로는 옥류천 시설과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조선시대 궁궐 후원은 국가 운영 기반시설과 임금의 생활 공간이 융합된 구성을 보였다"며 고종이 경복궁 후원을 만들면서 창덕궁 후원 운용 체계를 그대로 따랐다고 분석했다.

청와대는 역사적으로 경복궁 후원…"고종이 창덕궁 본떠 조성"
건축학 연구자인 김성도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장은 북궐후원도형을 바탕으로 경복궁 후원 넓이를 20만3천905㎡로 추산하기도 했다.

오늘날 경복궁 면적인 44만7천㎡의 절반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김 실장은 '고종조 중창된 경복궁의 학술적 고찰'이라는 글에서 "경복궁 후원은 거의 창경궁 규모에 가깝고, 건축물 32동이 있었다"며 "후원 궁성 동쪽에는 또 다른 후원 영역이 있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백악산 전체가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후원이 되도록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윤 당선인이 집무 공간을 확정하지 않아 청와대 부지 활용 방안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이뤄질 경우 경복궁 후원의 정체성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문화계에서 나오고 있다.

학계 관계자는 "청와대는 북악산과 경복궁을 이어주는 중요한 녹지 축이라고 할 수 있다"며 "청와대가 국민 품으로 돌아온다면 일제가 훼손한 경복궁 후원을 복원해 조선 으뜸 궁궐의 역사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