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생산 라인에 들어가는 산업용 로봇 장비를 제조하는 A사는 올초 러시아 반도체업체와 130만달러(약 16억원) 규모 초도 설비 공급 계약을 맺었지만, 아직 물건을 배에 싣지도 못했다.

러시아 현지 은행들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의 제재 대상으로 지정돼 대금 지급이 어렵다고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공급하기로 돼 있던 장비의 보관 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현지 업체에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비 유치도 거부하겠다고 해 회사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A사 대표는 “장비 제작을 위해 원자재 구입에 수십억원을 썼는데 러시아와 거래할 수 없어 돈줄이 막혔다”며 “기술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최근 시중은행에서 대출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러시아에 진출했거나 수출을 하는 국내 중소기업들이 대(對)러시아 수출·금융 제재 강화로 인한 대금 결제 차질, 거래 중단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밥솥 등 생활가전 제품을 생산하는 쿠첸은 작년 9월 현지화 전략에 따라 개발한 멀티쿠커 플렉스쿡의 판로를 고민하고 있다. 플렉스쿡은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며 지난해 85만달러 규모 첫 선적 물량을 모두 판매했다. 이에 플렉스쿡의 올해 수출 목표량을 기존보다 세 배가량 높여 설정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3월 이후 추가 수출분에 대한 목표 재설정이 불가피해졌다. 쿠첸 관계자는 “2월까지 선적한 모든 물량은 수금을 끝냈지만 앞으로가 문제”라며 “러시아 외에 다른 해외 거래처를 찾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동나비엔도 러시아 현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경동나비엔은 현지 보일러 시장 1위 업체로, 러시아법인(나비엔루스)도 있다. 올초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미리 러시아에 필요한 수출 물량을 선행 공급해 현지 판매에는 영향이 없다는 게 자체 분석이다. 하지만 러시아 제재가 장기화하면 루블화 가치 하락에 따른 환차손, 외화 수급 등의 문제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경동은 “현지 법인과 본사 간 계약 관계 등을 검토해 대금 결제 방법을 변경하는 등 피해를 줄일 방법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태 중소기업피해신고센터에 지난 7일 기준 44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업종별로는 화학 14건, 금속 11건 등 제조업이 31개로 비교적 많았다.

김동현/민경진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