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등 원자재의 최대 수출국인 중남미 국가들이 '원자재 슈퍼사이클'에도 웃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경제가 구조적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17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부터 원자재 가격이 급등세를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국가들의 미국 달러화 대비 통화 가치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원 수출이 국가 경제의 중요 축을 담당하는 중남미 국가들의 경우 원자재 가격과 화폐 가치가 밀접하게 연동되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최근에는 그같은 공식이 깨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예를 들어 구리 가격의 경우 지난 한해 동안 25% 올랐지만, 최대 구리 수출국인 칠레의 페소화는 미국 달러화 대비 17% 폭락했다. 칠레뿐만이 아니다. 콜롬비아 페소화는 달러 대비 가치가 16% 하락했으며, 페루의 솔화는 9% 이상 하락했다. 브라질의 헤알화도 7% 가량 떨어졌다. 시장전문가들은 원자재 가격과 통화 가치의 격차는 중남미 경제 구조가 병폐에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시티그룹의 중남미 수석 경제학자 에르네스토 레빌라는 "이는 매우 나쁜 소식"이라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구조적 손상을 입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중남미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코로나19 백신 확보에 뒤처졌다가 지난해 초부터 적극적으로 백신 구하기에 나서면서 팬데믹(전염병의 대유행) 타격에서는 벗어난 것처럼 보여진다.
출처=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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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코로나19 기간 동안 급격히 늘어난 부채 규모와 거센 인플레이션 압력, 좌파 포퓰리즘 득세라는 정치적 리스크까지 더해지면서 원자재 슈퍼사이클이라는 호재를 상쇄시키고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골드만삭스는 특히 정치적 리스크로 인해 중남미 지역의 경기가 휘청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알베르토 라모스 중남미 이코노미스트는 "상품 가격이 상승세를 이어가는 시기에 정치적인 리스크 때문에 상품 가격과 통화 가치의 상관관계가 상당 부분 깨졌다"며 "콜롬비아와 칠레, 페루, 브라질에서는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리스크가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FT는 "칠레에서 지난해 12월 강경좌파 성향의 35세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당선된 게 이러한 추세의 전형"이라고 전했다. 보리치 대통령은 사적연금제도를 폐지하고 광산업 규제를 예고했다. 공공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증세하겠다는 공약도 내건 바 있다.

FT는 "투자자들이 칠레가 정치적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요동쳤다"면서 "2019년 10월 이후 칠레에서 빠져나간 투자 규모만 500억달러"라고 강조했다. 페루에서도 지난해에만 150억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1970년 이후 최대규모의 자본유출 사태를 겪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