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회항‘에 이어 인천 송도의 한 어린이 집 보육교사가 김치를 남겼다며 네 살 된 여아를 폭행해 전국적으로 ‘어린이 집 폭행 파문’을 일으켜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번 사건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가진 자가 베풀어주는 ‘하사품’이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상식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덕의식의 결여’에 대한 분노다. 직업적 차별화로 느껴지는 ‘복수’에 대한 분노다. 이들에게서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배운 ‘소박한 도덕의식’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득권층이나 상대적으로 힘이 강한자의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 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강자(가진 자)와 약자(가진 것이 없는 자)간의 좋은 관계 형성의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권력의 역학관계라는 속성으로 들여다보면 이미 구조적인 부정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심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더커 켈트너 박사는 ‘과자실험‘을 하였다. 학생 3명으로 팀을 만들어 두 명은 보고서를 쓰고, 한 명은 그것을 평가하는 역할을 맡게 하고, 과자 5개를 주었다. 모두 하나씩 먹고 결국 2개의 과자가 남은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남은 과자를 집어가겠는가? 보통의 경우 누구든 과자를 집기가 쉽지 않다. 일상적인 밥상에서, 술자리에서 남은 하나의 반찬이나 안주를 집는 건 심리적 부담이 작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실험에서 꽤 많은 팀에서 과자를 차지한 사람은 평가를 담당했던 학생이었다. 비슷한 연구인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어린이용 과자를 넣은 병을 준비했는데 부자는 일반인의 두 배 이상의 과자를 빼앗았다.
스탠퍼드대 로버드 서트 교수는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해 “사람은 권력이나 부(富)을 가질 때 자신의 욕구에 더 많이 집중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에는 관심이 줄어든다, 그리고 공식적, 비공식적 규칙들도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한다면 강자와 약자 사이에게 좋은 관계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 모른다.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위의 실험 결과는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행하는 ‘갑의 횡포’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보육교사, 대학교수의 제자 성추행, 백화점 모녀사건, 경비원 자살 등 힘 있는 자들이 행하는 불편한 진실이 삶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일상을 되돌아봐야 한다. 오늘 행하는 당신의 모습이 ‘갑 질‘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항상 갑으로 만 살 순 없다는 것을…
4백여년간 대대손손 만석의 부를 누리면서도 이웃과 공존하며 주민의 존경을 받아온 집안이 있다. 바로 ‘경주 최부잣집‘이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말아라’, ‘과객을 후하게 대하라’ 등 최부잣집의 육훈은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과 같은 ‘타인을 배려하는 나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소위 재벌이라는 대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접수하는 등 웃지 못할 현실에 비춰볼 때, 만석이 넘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웃 등 사회에 되돌려줬던 경주 최부잣집의 삶은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by. 경영평론가 정인호 / VC경영연구소 대표(ijeong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