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폭락에 산유국 비상…베네수엘라 "이러다 망할 수도" [원자재리포트]
국제 유가가 급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앞서 선물 거래 만기를 앞둔 주요 유종에서 ‘마이너스 거래’를 한 번 보고 나니 주요 산유국간 감산 합의 등도 별 소용이 없는 모양새다.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22일 오후 2시 기준 10.90달러에 손바뀜되고 있다. 전장대비 5.89% 내렸다. 북해산 브렌트유도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통한 20달러선이 뚫렸다. 16.61달러에 거래되고 있어 전장 대비 하락폭이 14.07%에 달한다.

연일 유가가 급락하면서 산유국들은 비상이 걸렸다. 여러 산유국에게 원유는 국가 재정 대부분을 조달하는 생명줄이라서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등을 비롯한 중동 주요 산유국과 러시아 등은 원유 경제 의존도가 높다. 각국이 원유 생산 손익분기점에다 재정균형유가까지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재정균형유가는 한 나라가 재정적자를 보지 않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원유 가격이다. 일부 국가에선 시장 유가와 재정균형유가간 격차가 확 늘면서 실업자가 폭증하고 정치적 혼란이 일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사우디·UAE·쿠웨이트 ‘적자 불가피’

원유의존도가 매우 큰 사우디, UAE, 쿠웨이트는 상당한 재정적자를 면치 못할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올해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76.1달러는 돼야 적자를 안 본다. UAE는 69.1달러, 쿠웨이트는 61.1달러가 재정균형유가다. 반면 중동 주요 유종인 오만유와 두바이유 가격은 각각 20달러, 28달러 선에 그친다.

이중 재정균형유가가 가장 높은 사우디는 유가가 40~50달러를 오간 작년에도 국내총생산(GDP)의 23% 만큼 적자를 봤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우디는 석유산업이 GDP의 절반, 수출 수익의 70%를 차지한다”며 “이번 유가 폭락 사태로 20년만에 최대폭으로 경제가 위축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 국가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평이다. 그간 석유를 팔아 쌓아둔 자금이 있어서다. 사우디, UAE, 쿠웨이트 모두 이를 기반으로 각각 대형 국부펀드를 굴리고 있다. 포브스는 “중동 부국들은 국부펀드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지출을 늘려 일단 경제 타격을 완화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소 산유국은 실업률 비상

중소 산유국 일부는 이미 나자빠지는 모양새다. 바레인은 지난달 초 사우디와 러시아가 유가 전쟁을 선언한지 약 약 2주만에 민간은행에 1조 규모 대출을 신청했다. 오만은 올해 재정지출을 13억 달러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오만 재무부는 “유가 하락세가 지속될 경우 적자를 막을 순 없다”고 밝혔다. 바레인 재정균형유가는 95.6달러, 오만은 86.8달러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선 실업률이 폭증할 전망이다. 나이지리아는 석유가 수출의 90%, 정부수입의 절반을 차지한다. 올해 예산안은 유가가 57달러를 유지한다는 전제로 짰다.
IMF는 다음달까지 나이지리아가 팔지 못하고 남은 원유 재고가 5000만 배럴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인해 올해 실업자가 2500만명 수준으로 늘 것이라고 추산한다. 2018년(2000만명)에 비하면 25% 늘어난 수치다.

◆이라크, 베네수엘라 등 “나라 뒤집힐 수도”

반면 이라크와 베네수엘라 등은 유가 하락으로 정국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세 나라는 유가 전쟁 이전부터도 경제 구조가 매우 취약해서다.

앞서 두 나라는 각각 작년 중반에서 올해 초 사이에 대규모 반(反)정부 시위를 겪었다. 당시 각국 국민들은 민생고와 인프라 부족, 높은 실업률 등에 불만을 터뜨렸다. 이로 인한 정국 혼란도 이어지고 있다. 이라크는 반정부 시위 이후 총리직이 공석 상태다. 베네수엘라는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필두로 ‘한 나라 두 정부’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이라크는 정부 지출의 90%, 베네수엘라는 60%를 원유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유가가 폭락해 민생고가 가중되면 사회적 불안이 높아져 또 대규모 시위가 재발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는 “25달러 유가 10년은 버틴다”지만

러시아는 올해 예산안을 우랄산 원유가 배럴당 42.4달러에 팔린다는 전제를 두고 마련했다. 유가가 이 이하로 떨어지면 적자다.

러시아는 앞서 배럴당 25~30달러 유가를 최장 10년간은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240억 달러 규모 국부펀드를 두고 있어 한동안 이를 방패막 삼아 유가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포브스 자료에 따르면 이 경우 러시아는 매년 400억~500억 달러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 에너지부문 경제 의존도가 높아 이는 매우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러시아는 연간 수출의 절반 가까이를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GDP에서 에너지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달한다. 전체 노동력의 1.5%가 에너지업계에서 일한다.

◆미국 “원유업계 휘청이면 중산층 위주 타격 커”

민간 에너지기업들이 석유를 생산하는 미국은 재정균형유가 개념이 따로 없다. 주요 외신들은 미국 에너지업계가 운영에 별 문제없이 현상 유지를 하기 위해선 유가가 배럴당 48달러는 유지돼야 한다고 본다. 셰일가스를 시추부터 생산·판매하는 경우 손익분기점과 비슷하다.

22일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6월 선물가격이 10달러 선을 횡보하면서 미국 원유업계에선 각 업체들이 ‘적자생존’ 시기에 돌입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전날 셰일기업인 유닛 코퍼레이션은 파산 절차 준비에 돌입했다. 중소 에너지기업을 위주로 회사채 디폴트가 이어질 경우 위기가 금융업계로 전이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니콜라우스 롤레더 뉴아메리칸에너지 선임트레이더는 “미국 GDP에서 에너지업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8%에 달하고, 정유업계 근로자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인 이들”이라며 “유가 하락으로 에너지업계가 구조적 피해를 입으면 미국 내 일자리와 소비여력이 심각하게 줄어 올해 이후까지 이번 타격 여파가 남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