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단색화가 하종현 화백(84)은 1960년대부터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50여 년을 숨차게 달려왔다. 그의 예술적 삶은 도전과 실험의 연속이었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즉흥적인 추상화 장르인 ‘앵포르멜 스타일’에 몰두한 그는 전위적 미술가그룹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하고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해 물성을 탐구했다. 1974년 마대(麻袋) 캔버스 앞면에 그리지 않고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넣는 독특한 작업 ‘배압법(背押法)’으로 현대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었다. 베니스비엔날레, 파리비엔날레 등 굵직한 국제전은 물론 미국과 유럽의 유명 화랑에 잇달아 초대되며 박서보, 이우환과 더불어 한국추상미술의 ‘간판’으로 우뚝 섰다. 서울시립미술관장, 홍익대 미술대학장을 지낸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종현 화백이 마대 캔버스에 다홍색 물감을 채색한 최근작 ‘접합’을 설명하고 있다.
하종현 화백이 마대 캔버스에 다홍색 물감을 채색한 최근작 ‘접합’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달 28일까지 부산 망미동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펼치는 개인전 ‘하종현’전은 반세기에 걸쳐 담금질한 화가의 예술적 완숙함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마대 자루를 활용해 사물과 관념, 신체와 감정의 통합을 시도한 100호 이상 대작 ‘접합’ 시리즈 15점을 걸어 단색화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싶은 노(老) 화가의 마음을 담았다.

하 화백은 “단색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오직 한 길만 걸어왔다”며 “세계 미술계가 단색화를 한국 고유 추상화로 인정한 만큼 죽는 날까지 쉼없이 파고들겠다”고 말했다.

80대에도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그에게 단색화란 무엇일까. “자질구레한 군소리를 싹 뺀 인내심의 회화”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의 출품작 ‘접합’ 시리즈는 고통의 산물이다. 수도승이 도를 닦듯 색채로서의 물감뿐 아니라 물질로서의 물감을 화면에 녹여냈다. 또 마대와 물감을 변주하고, 자신의 신체적 동작과 감정을 화면에 이입해 미묘한 관계를 찾아 나섰다. 2010년대 들어서는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에서 벗어나 마대 자체 색을 부분적으로 그대로 드러내거나 앞면의 표면에 그을음을 입히기도 했다. 얇은 철사를 이용해 표면을 다시 긁어내 음각 형태로 서체 같은 표식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적색, 청색, 다홍색, 검은색, 흰색 등 강렬한 물감으로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젊은 시절 무한대로 쏟아져 나왔던 에너지를 상상하며 정신의 깊이를 다지고 싶어서다. 그의 이런 끝없는 실험정신과 열정은 해외 미술계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지난 3월 도쿄 블럼앤드포갤러리에 이어 9월 밀라노 카디갤러리, 내년 2월 런던 알민레시갤러리의 초대를 받았다.

하 화백의 그림은 친절하지 않다. 쉽고 예쁜 구상화의 문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개념적 성찰보다는 제멋대로 쏟아내는 즐거움, 의도하지 않은 우연성이 늘 존재한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논리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독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미지가 주는 낯선 느낌 자체를 즐기게 한다. 홍시처럼 빨갛게 영근 그림을 그려놓고 그는 시를 읊었다. “색채 덩어리를 옷처럼 뒤집어쓰고 어둠을 깨운다. 육체의 고통은 그림의 운명이고, 사랑이다. 단색화는 통쾌한 해방감이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