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제조업체 A사의 기획담당 임원은 요즘 회계법인 및 인수합병(M&A) 부티크(중개업체)들이 보내는 ‘러브콜’에 사실상 일상적인 업무를 내려놨다. 몇 달 전 “기술력 있는 제조업체 인수를 검토하고 있으니 소개해달라”고 부탁한 이후 끊임없이 날아오는 ‘M&A 대상 리스트’를 하나씩 검토해야 해서다. 그는 “매출 1000억원 이상 중견·중소기업 중 매물로 나온 곳만 300개에 달한다”며 “대부분 미래 생존에 자신감을 잃은 가운데 상속세 부담까지 안고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경영권 위협 거센데…"물려받은 주식가치의 65%를 상속세로 내라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율

기업승계를 포기하게 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율이다. 국내 기업 오너가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줄 때 내는 명목 상속세율은 50%. 하지만 최대주주 지분을 물려받으면 30% 할증이 붙어 실질 세율은 65%로 높아진다. 독일(4.5%) 벨기에(3.0%) 스페인(1.7%)은 물론 프랑스(11.2%) 영국(20.0%) 일본(55.0%)을 능가한다. 캐나다 호주 스웨덴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개국 중 절반인 17개국에선 자녀가 기업을 물려받을 때 아예 상속세를 물리지 않는다.

‘징벌적인 상속세율’에 속이 타들어가는 기업은 하나둘이 아니다. 삼성은 훗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부모 지분을 물려받을 때 상속세 여파로 경영권이 약화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 어머니 홍라희 여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4.72%)의 절반 이상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어서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과 홍 여사 지분의 현재가치가 13조3500억원에 달하는 만큼 이 부회장은 8조~9조원가량을 상속세로 내야 한다”며 “너무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 상속 주식을 일부 팔아 상속세를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19.7%인 삼성가(家) 및 계열사의 삼성전자 지분율은 더 떨어지게 된다. 여기에 국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돼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보유지분 7.9%의 대부분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자칫 해외 기업 또는 펀드의 ‘적대적 M&A’ 타깃이 될 것으로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CJ도 상속세 부담에서 자유롭지 않은 대표적 그룹으로 꼽힌다. 지주회사인 CJ(주)의 최대주주는 46.84%를 보유한 이재현 회장이다. 이 회장의 아들 선호씨를 비롯한 친인척들이 보유한 CJ(주) 주식은 미미하다. 그런 만큼 선호씨가 이 회장 보유지분을 물려받을 때 상당 규모의 CJ(주) 주식을 매각해야 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차등의결권이라도 인정해달라”

재계에서는 상속세율을 낮추기 어렵다면 차등의결권이라도 도입해달라고 요구한다. 상속세를 내느라 대주주 일가의 지분율이 떨어지더라도 경영권만큼은 보장해달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1주=1의결권’ 원칙의 예외를 인정하고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지닌 주식 발행을 허용해달라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미국은 상속세율이 40%로 높은편이지만, 차등의결권을 통해 경영권을 보호해 주고 있다. 워런 버핏이 운영하는 투자회사 벅셔해서웨이는 버핏 회장에게 일반주주의 200배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부여하고 있다. 경영권을 확실히 보장할 테니 투자에만 전념해달라는 뜻이다. 미국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중국 샤오미의 레이쥔도 차등의결권을 인정받고 있다.

차등의결권을 이용해 100년 이상 가족의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도 있다. 미국 포드가 대표적이다. 주당 16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차등의결권 주식 대부분을 포드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지분율이 희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차등의결권은 가문의 일원에게만 매각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4일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제출하면서 “상법 개정보다 차등의결권,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제도)처럼 글로벌 스탠더드(표준)에 부합하는 경영권 방어수단의 법제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홍성일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팀장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상속세율을 20~30% 수준까지 낮추는 것”이라며 “당장 세율 인하가 어렵다면 차등의결권을 모든 기업에 적용해 경영권 방어 수단을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상헌/박상용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