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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상헌
    오상헌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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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경 문화부장입니다. 깊이 있는 기사, 품격 있는 지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이슈프리즘] 반성문 쓴 유럽의 길을 갈 것인가

    “유럽요? 박물관으로 먹고사는 나라답게 기술도 박물관에 있을 법한 옛것뿐이잖아요. 미국·중국 기업은 일거수일투족까지 챙기지만, 혁신이 사라진 유럽은 관심 밖입니다.”국내 굴지의 테크기업 고위 임원에게 매일매일 동향을 체크하는 해외 기업 리스트를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엔비디아, 테슬라, BYD, 바이두 등 스무 개 넘는 이름을 읊는 동안 유럽 기업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곱씹어 보니 취재 과정에서 유럽 테크기업이 거명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전쟁 무대에 오른 회사는 미국 아니면 중국이다. 엔비디아, 구글, 테슬라가 실리콘밸리식 혁신으로 길을 열면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바이두, 텐센트, BYD, 유니트리 등 중국 기업이 순식간에 따라붙는 양상으로 전개된다.‘AI 시대’의 동반자인 배터리, 반도체, 전기차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CATL’로 키우겠다던 스웨덴 노스볼트는 파산했고, 유럽에서 제일가는 칩 메이커인 독일 인피니언과 네덜란드 NXP는 규모와 수익성 등에서 TSMC, 삼성전자, SK하이닉스보다 몇 수 아래다. 유럽의 ‘마지막 자존심’인 자동차 역시 ‘예정된 미래’인 전기차에서 중국에 한참 밀린다.20년 전만 해도 미국과 맞먹는 산업 강국이던 유럽이 어쩌다 이런 신세로 전락했을까.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024년 9월 내놓은 ‘EU(유럽연합) 경쟁력의 미래’라는 보고서에 그 답이 있다. ‘유럽이 쓴 반성문’으로 불리는 이 보고서는 유럽의 위기를 미국·중국과 비교되는 ‘혁신의 격차’에서 찾았다.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자동차 등 전통산업에 의존

    2026.01.21 17:04
  • [이슈프리즘] 기업 경쟁력이 균형발전보다 먼저다

    전자업계를 취재하던 2019년 초 얘기다. 당시 최대 관심사는 120조원 규모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가 어디에 둥지를 트느냐였다. 투자 규모가 워낙 큰 데다 동반 입주를 예약한 50여 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까지 품을 수 있는 만큼 일자리와 세금에 목마른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유치전에 뛰어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지역 정치인까지 달라붙어 애원도 하고, 압박도 했지만 SK하이닉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들 경기 용인과 이천, 경북 구미, 충남 천안, 충북 청주시 등이 제안한 인센티브와 입지 조건 등을 따져보느라 시간이 걸리겠거니 생각했다. 지역 균형발전에 꽤나 진심이던 문재인 정부 때였던 만큼 비수도권 지자체도 승산이 있다고 기대했다.착각이었다. SK의 선택은 처음부터 용인이었다. 그즈음 만난 SK 고위 관계자의 설명은 명쾌했다. “애초 비수도권은 리스트에 없었다. 필요한 사람을 뽑을 수가 없는데, 공장만 덩그러니 지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SK가 용인을 택한 이유는 공짜 땅도, 세제 혜택도 아닌 ‘사람’과 오랜 시간을 들여 경기 남부에 구축한 ‘반도체 인프라’였다. 일정 기간 훈련받으면 누구든 생산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일반 업종과 달리 첨단 반도체는 제조 현장에도 석·박사급 인력이 대거 들어간다. 반도체는 최대 1000개 공정 가운데 어느 하나만 꼬여도 불량이 나기 때문에 연구개발(R&D)과 제조가 ‘한 몸’처럼 움직이며 시제품 생산부터 양산 과정까지 발생하는 수많은 오류를 현장에서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 반도체협회 회원사의 85%가 있는 수도권을 내버려 두고, 지방에 새로운 제조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 역시 한

    2025.12.23 17:15
  • [이슈프리즘] 제2의 젠슨 황이 한국서 나오려면

    한국에서 이렇게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해외 기업인이 언제 또 있었을까.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 테크업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이 수없이 한국을 찾았지만, 다들 필요한 사람만 만나고 조용히 떠났다.열흘 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방한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달랐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한국 국민들을 기쁘게 할 선물을 들고 간다”고 분위기를 띄우더니, 없어서 못 판다는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개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세계적인 기업인들의 만남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는 치킨집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초청하는가 하면, 유튜버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주변 시민들에게 치킨과 바나나맛 우유를 돌리기도 했다. ‘록스타’라는 별명대로 그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하지만 삐딱한 눈으로 돌이켜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GPU부터 그렇다. 황 CEO는 “선물”이라고 했지만, 공짜는커녕 할인도 해주지 않는다. 그저 다른 데보다 먼저 준다는 걸 선물로 포장했는데도 제값 다 주고 사는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만에 세워준 연구개발(R&D)센터 같은 ‘진짜 선물’은 없었는데도.‘치킨 회동’도 불편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국 대표 기업인들을 들러리로 세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황 CEO는 치킨을 나눠주기 위해 이 회장과 정 회장을 앉혀놓은 채 수시로 자리를 비웠고, 치킨 회동을 끝낸 뒤엔 두 사람을 엔비디아 내부 행사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통상 ‘셀러는 을, 바이어는 갑’이지만,

    2025.11.11 17:40
  • [이슈프리즘] 韓 제조업 미래는 누가 고민하나

    “중국이 제조 혁신에 나섰다고 화웨이 같은 회사가 자동차 등 다른 분야에서 곧 나올 것이란 기대는 너무 조급한 (중국의) 바람일 수 있다.”2015년 3월 리커창 전 중국 총리가 ‘중국 제조 2025’ 계획을 꺼낸 직후 KOTRA는 이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다른 연구기관들의 평가도 대개 비슷했다. 중국은 혁신보다 ‘베끼기’에 능한 만큼 아무리 용을 써도 첨단산업의 판도를 뒤엎는 건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지금은 다 틀린 얘기가 됐다. 중국은 당시 선정한 10대 산업 중 7개 분야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섰다. 그중에는 KOTRA가 “너무 조급한 바람”이라고 한 자동차(BYD·전기차 1위)도 들어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이 작년에 목표의 86%를 달성했다고 분석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애초 설계부터 달랐다. 명문 이공대 출신이 포진한 공산당 수뇌부는 중국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을 첨단 기술의 미래와 엮어 촘촘하게 그렸다. ‘월간 12인치 웨이퍼 생산량 100만 장 달성’처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 뒤 일당독재의 힘을 빌려 강하게 밀어붙였다.핵심은 탄탄한 생태계와 확실한 성과보상 문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 개별 기업의 흥망성쇠와 무관하게 중국 제조업의 번영이 지속되니까. 그렇게 중국은 자국 기업만으로 전기차·로봇·태양광 등 핵심 산업 생태계를 차례차례 완성했고, ‘공대 열풍’을 일으켜 가장 똑똑한 인재들의 기업행(行)을 부추겼다. 그러고는 ‘9·9·6’(오전 9시 출근·오후 9시 퇴근·주 6일 근무)과 막대한 보조금으로 미국과 유럽이 수십 년 동안 쌓은

    2025.09.30 17:47
  • [이슈프리즘] 모래주머니 6개 달고 뛰는 韓 기업들

    모래주머니가 ‘훈련용’일 뿐 ‘실전용’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실험으로도 증명된 팩트다. 육상선수 16명의 허리와 발목에 2~3㎏짜리 모래주머니를 채운 채 50m를 전력 질주토록 했더니, 평소보다 0.4~0.7초 늦었고(2007년 일본 쓰쿠바대 연구), 농구선수 10명의 허리에 체중의 10%에 해당하는 모래주머니를 달았더니 점프 높이가 11% 줄었다(1995년 호주 스포츠과학연구소).부상 위험도 커진다. 발목에 대략 3~7㎏짜리 모래주머니를 달고 걸으면 무릎과 고관절 충격이 20%가량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2016년 한국체대)도 있다. 뜬금없이 모래주머니 얘기를 꺼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을 정부·여당만 모르는 것 같아서다. 훈련용인 모래주머니를 ‘선수’(기업)들에게 주렁주렁 채운 상태로 링에 올려보내고 있기 때문이다.얼마 전 만난 한 기업인은 “지금 대한민국 기업들은 10㎏짜리 모래주머니를 6개나 단 상태로 글로벌 기업들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이런 얘기다. 두 다리는 미국의 관세 폭탄과 보조금을 앞세운 중국의 진격이라는 큼지막한 모래주머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속도가 뚝 떨어졌다. 모래를 조금이라도 덜어줘야 할 정부·여당은 오히려 우리 기업들의 허리춤에 법인세 인상이라는 짐을 얹었다. 최근 4~5년간 70% 넘게 인상한 산업용 전기료도 더 올리겠다고 한다. 중심축(재무 건전성)이 흔들리니, 점프가 될 리 없다.양쪽 어깨는 노동 규제에 짓눌려 있다. 먼저 노조법 개정안(노란봉투법). 정부·여당은 각계의 반발에도 국회 통과를 밀어붙일 기세다. 하청기업 근로자가 자기네 회사를 건너뛰고 일감을 준 원청기업과 직접 교섭할 수

    2025.08.21 17:31
  • [이슈프리즘] 밸류업, 기업 살리기가 먼저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일본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은 우리의 상법 개정안처럼 갑자기 뚝딱 떨어진 게 아니다. 아베 신조 정부 출범 이후 10년 넘게 빚고 다듬은 결과물이다. 그 출발점은 2014년 8월 나온 ‘이토 리포트’였다. 경제산업성의 의뢰를 받은 이토 구니오 히토쓰바시대 특임교수를 좌장으로 한 43명의 전문가 그룹은 1년 넘게 기업 경영자와 장기 투자자, 시장 관계자들을 만나 일본 기업이 저평가된 이유를 찾았다.이들은 저평가 이유 중 하나로 낮은 자기자본이익률(ROE)을 지목했다. 당시 일본 기업의 평균 ROE는 5% 안팎으로, 미국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토 리포트는 일본 기업의 평균 자본비용이 7% 초중반인 만큼 ROE를 8% 이상으로 끌어올리면 투자자들이 일본을 다시 찾을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ROE를 높이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당기순이익을 더 많이 내거나 자기자본을 줄이거나. 산식(당기순이익÷자기자본×100)에 다 나와 있다. 분자(당기순이익)를 늘리려면 내부 유보금을 투자해 기존 사업을 강화하거나 신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적자 사업을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될 터다. 분모(자기자본)를 줄이려면 배당을 늘리거나 자사주를 매입·소각하면 된다.이토 리포트는 ROE를 높이는 근본적인 방법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 현금을 쌓지 말고 미래 투자에 써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기업이 현재에 안주하는 건 위험하다. 적절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 한다.” 주주환원 확대와 함께 이사회 기능 강화, 투자자와의 대화 확대 등 지배구조 관련 내용도 담았지만, 어디까지나 방점이 찍힌 것은 ‘체질 개

    2025.07.14 17:45
  • [이슈프리즘] 이재명 정부, '경제 모범생' 되려면

    1997년 영국은 18년 보수정권을 끌어내린 마흔네 살 노동당 총리에게 푹 빠져 있었다. 젊은 지도자가 그릴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단, 기업인은 예외였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선거 전 노동당 정강에서 ‘생산·분배·교환수단의 공동 소유’ 조항을 빼는 등 ‘오른쪽 깜빡이’를 켰지만, 집권 후에는 핵심 지지 기반인 노동자 우대 정책을 내놓지 않겠느냐는 우려에서였다. 그렇게 되면 1970년대 영국을 유럽의 병자로 만든 ‘영국병’(고복지·고비용·저효율 사회)이 다시 도질 것이라는 게 이들의 걱정이었다.블레어 총리는 달랐다.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면 보수당 정책이건, 노동당 정책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복지에서 일터로’(Welfare to Work)를 모토로 무작정 주던 실업급여제도를 재취업 준비 프로그램과 엮었다. 퍼주기 복지를 막기 위해 정부부채 수준을 국내총생산(GDP)의 40% 이내로 막는 재정준칙도 마련했다. “국부의 원천은 기업에서 나온다”는 판단에 33%인 최고 법인세율을 30%로 낮췄고, 보수당이 만든 노동 유연성 체계도 그대로 유지했다.‘토니 블러’(blur·우파인지 좌파인지 흐릿하다는 의미)란 비아냥에도 흔들리지 않은 블레어리즘의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가 맡은 10년간(1997~2007년) 영국의 연평균 성장률(2.8%)은 유럽 평균(2.2%)을 웃돌았고, 10%에 달한 실업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자 글로벌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영국의 GDP 대비 해외직접투자(FDI) 순유입은 1996년 2.3%에서 2005년 10%로 올랐다.20~30년 전 영국 얘기를 꺼낸 것은 그제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블레어 총리의

    2025.06.05 17:29
  • [이슈프리즘] 철강산업에도 특별법이 필요하다

    보름 전, 경기 화성시 남양도서관의 볕 잘 드는 곳에 자그마한 공적비 하나가 세워졌다. 주인공은 우정 김재관 박사(1933~2017). 독일 뮌헨공대에서 기계공학 박사과정을 밟던 1964년, 독일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발적으로 만든 ‘종합제철소 건립 방안’ 보고서를 건넨 대한민국 산업화의 설계자이자, 3년 뒤 ‘대한민국 1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포항제철소의 밑그림을 그린 당대 최고의 철강 전문가였다. 공적비는 “대한민국이 김 박사에게 큰 빚을 졌다”는 걸 뒤늦게 안 한 재단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의 고향에 세운 것이었다.그때 김 박사가 그 보고서를 만들지 않았다면, 박 대통령이 종합제철소를 갈망하지 않았다면, 박태준 회장이 뚝심 있게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한강의 기적’은 없었을 터다. 포스코가 1970~1980년대 국제 철강 시세보다 30~40% 싼값에 양질의 철강을 공급한 덕분에 조선, 자동차, 가전산업이 태동할 수 있었다.그 포스코가 지금 비틀거린다. 중국의 저가 공세와 국내외 경기 침체에 내몰린 상황에서 미국의 25% ‘관세 폭탄’까지 더해져서다. 본거지인 포항제철소는 작년에 이어 올 들어서도 적자 행진이다. 지난해 효율이 떨어지는 공장 2개를 닫았는데도 그렇다. 그나마 잘 팔리는 자동차용 강판이 주력인 광양제철소 덕분에 근근이 버틴다. 2021년 9조원이 넘은 포스코홀딩스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2조17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올 1분기에도 1년 전보다 2.6% 감소했다.투자할 곳은 산더미인데 곳간은 비어가는 상황이다. 미국 관세 폭탄에 대응해 현대제철이 루이지애나에 짓는 일관제철소에도 목돈을 넣어야 하고, 인도 제철소 건립에도 조단위

    2025.05.01 17:56
  • 이슈프리즘 우리는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문재인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맞은 2019년 11월 즈음의 일이다. 취재하며 가까워진 고위 공무원이 “기사로 쓸 만한지 한번 보라”며 슬쩍 서류뭉치를 건넸다. 제목은 ‘한국의 성장률 둔화’. 영국계 투자은행 HSBC가 글로벌 자산운용사 같은 ‘큰손’ 고객에게만 제공한다는 비공개 보고서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어려운 시기에 한국 정부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밀어붙여 성장률 하락을 부추긴 건 (한국에) 특별히 아픈 대목이다. 한국 정부가 성장 둔화를 자초한 셈이다.’ 함께 건네받은 골드만삭스의 비공개 보고서 내용도 비슷했다. ‘엄격하게 설계된 주 52시간제가 총생산시간을 감소시켜 내년 성장률을 0.3%포인트 깎아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자료 유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을 꼬집은 자료를 준 이유가 궁금했다. 그가 들려준 얘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진 자원이라곤 ‘열심히 일하는’ 인적자원뿐인데, 그걸 우리 스스로 옭아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냥 두면 대한민국 성장동력이 무너질 게 뻔하니, 답답해서 그럽니다.” 5년여가 흐른 지금, 그 공무원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반도체, 스마트폰, 배터리 등 모든 주력산업이 미국에 치이고 중국에 뜯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인공지능(AI), 로봇 등 미래산업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경쟁국들과 격차가 벌어졌다. 모든 산업의 경쟁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약해졌다는 건 대개 둘 중 하나다. 바뀐 세상에 우리 기업만 적응을 못 했거나, 국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안타깝게도 한국 기업의 경쟁력 하락엔 이 두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2등에겐 떡고물 하나 떨어지지

    2025.03.11 17:31
  • [이슈프리즘] '트럼프 2기' 선물로 만들려면

    “산업 현장에서 느끼는 ‘제조강국 코리아’의 생존기간은 길어야 5년이다. 도널드 트럼프 덕분에 이 기간이 조금 더 늘어날 여지가 생겼다. 트럼프가 안겨준 ‘선물 같은 4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렸다.”굴지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얘기를 듣는 순간 두 가지 포인트가 귀에 꽂혔다. 묘수가 나오지 않는 한 대한민국 제조업은 2030년 ‘소멸의 길’에 접어든다는 것, 그리고 ‘트럼프 2.0’ 시대는 한국 제조업에 재앙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이다.중국에 밀려 패퇴할 운명이던 한국 제조업이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봉쇄’ 정책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됐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관세 폭탄을 예고해 온 터. 모든 수입품에 10~20%, 멕시코와 캐나다 제품엔 25%, 중국산엔 60% 관세를 물리는 게 골자다. 이를 두고 한쪽에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엔 엄청난 악재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다른 쪽에선 중국 관세가 훨씬 높은 만큼 반사이익을 누릴 기회라고 맞섰다.한국경제신문 취재팀은 트럼프 2기에 한국 주력산업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점검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미국 8개 도시에 터를 잡은 국내 기업을 취재해 지난주 ‘트럼프 2.0, K인더스트리 美 현장을 가다’란 기획 시리즈에 담았다. 현장을 둘러본 기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위기보다 기회로 생각하는 기업이 훨씬 많았다. 미국 기업들도 중국 공급망이 끊길 때 한국을 첫 번째 대안으로 꼽았다.”미소를 짓는 건 트럼프 대통령이 러브콜을 보낸 조선업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위세에 눌려 지리멸렬하던 태양광 기업도 미국을 터전으

    2025.01.20 17:48
  • [이슈프리즘] 피터 드러커가 CEO들에게 건네는 조언

    “이 책을 더 일찍 만났다면, 그 책에 담긴 조언대로 실행했다면, 회사의 미래가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올해 퇴임한 굴지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얼마 전에 찾은 ‘인생 책’이라며 뜻밖의 이름을 댔다. 피터 드러커의 <경영의 실제>다. 제아무리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가 쓴 책이라지만 70년 전에 나온 책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니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574쪽짜리 책을 펼쳤다. ‘경영학의 교과서’란 별칭 그대로 목표관리, 동기부여, 조직문화에 이르기까지 기업 경영 담론이 빼곡히 담겼다. 드러커는 많은 부분을 경영자의 역할과 책임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경영자는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생명력의 원천”, “경영자의 자질과 능력이 조직의 생존을 결정한다”며 시어스를 사례로 들었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50년 넘게 미국 유통업계 넘버원 자리를 지킨 ‘혁신의 아이콘’이자 잇따른 헛발질로 2018년 파산한 ‘실패의 대명사’로 통하는 그 회사 맞다.1893년 문을 연 시어스는 출발부터 남달랐다. 누구도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은 농부를 타깃으로 삼은 것부터 그랬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광활한 땅에 흩어져 사는 농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줄리어스 로젠월드 CEO는 오히려 이걸 사업 기회로 봤다. 농부들이 원하는 상품을 싸고 빠르게 배달하면 큰 시장을 손에 쥘 수 있다고 본 것. 세계 첫 우편주문·판매 시스템은 이렇게 탄생했다. 여기에 그 유명한 “불만족 시 무조건 환불” 정책이 더해지자 우편주문 카탈로

    2024.12.30 17:39
  • [이슈프리즘] "30분이라도 더 일하게 해주세요"

    얼마 전 야당 국회의원을 만났다는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가 들려준 대화 한 토막.“의원님 보좌관들은 1주일에 몇 시간 일합니까.” “바쁠 때는 70~80시간 할걸요.” “주 52시간제도 안 지키는 거네요.” “그거 지키면서 어떻게 일합니까. 나라가 돌아가지 않을 텐데요.”“반도체도 똑같습니다. 그러니 일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것참…. 삼성, 하이닉스가 대한민국입니까.”반도체업계의 숙원인 ‘화이트칼라 이그젬션(면제)’ 도입이 물 건너가는 모양새다. 여당은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에 한해 노사가 합의하면 주 52시간제의 예외로 인정하는 내용을 반도체특별법에 넣었지만, 야당은 근로기준법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친노동 성향 의원이 득실대는 환경노동위원회로 넘어가면 통과 가능성은 거의 없다.2018년 주 52시간제 도입과 함께 시작된 K반도체 연구원들의 ‘칼퇴근’이 내년에도 계속된다는 얘기다. 지난주 반도체산업협회 간담회에서 나온 “30분만 더 파고들면 풀릴 것 같은데 장비 전원이 훅 꺼진다. 다음날 장비 세팅에만 2시간 걸린다”는 업계의 하소연은 이번에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될 분위기다.정말 이래도 K반도체는 끄떡없을까. 반도체산업 경쟁 구도를 들여다보면 대략 그림이 보인다. 현재 K반도체의 전장(戰場)은 크게 네 곳이다. 첫 번째는 고대역폭메모리(HBM). 특이점은 만년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이 최신 HBM을 삼성보다 먼저 엔비디아에 납품한 것이다. 마이크론이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이란 ‘황금키’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SK하이닉스도 언제까지 기술 우위를 장담할 처지가 못 된다.범

    2024.12.02 17:42
  • [이슈프리즘] SK하이닉스와 헝그리 정신

    요즘 기업인을 만날 때마다 듣는 단어가 있다. ‘위기’다. 업종도 다르고 규모도 제각각인데, 다들 이 얘기만 한다. 우리 기업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힌단다. 힌트라도 얻을 요량으로 위기를 딛고 일어선 해외 사례를 뒤지지만, 기업 환경이 워낙 다르다 보니 그저 참고용에 그친다.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SK하이닉스가 있지 않냐”는 말이 돌아왔다. “한때 파산 위기에 몰렸던 골칫덩이가 ‘넘사벽’ 삼성 반도체보다 영업이익을 더 낸다니, 이렇게 드라마틱한 부활 사례가 세상 어디에 또 있느냐”면서.SK하이닉스는 지난 3분기에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영업이익 추정치 4조5000억원)을 압도하는 7조3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한국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기업’이 됐지만, 25년 전 모습은 사뭇 달랐다. 김대중 정부의 빅딜 정책에 따라 1999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출범한 하이닉스는 태어날 때부터 천덕꾸러기였다. 반도체 기업 특성상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돈을 투자해야 하는데, D램 가격 하락 여파로 탄생 직후부터 조(兆) 단위 적자를 냈기 때문이다. 하이닉스 이름 앞에는 ‘부실기업’ ‘동전주’(2003년 주가 125원)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다. 유동성 위기에 몰린 하이닉스는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채권단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2만2000여 명이던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급여는 5년 연속 동결했다. 반도체 하나만 남기고 휴대폰·LCD·전장·모니터 사업부를 다 떨어냈다.투자는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실적(매출 5조2887억원·영업적

    2024.10.29 17:42
  • [이슈프리즘] 가짜 전문가 전성시대

    1000가구 넘게 사는 경남 거제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큰불이 난 건 7년 전 이맘때다. 경차 ‘모닝’에서 시작한 불에 주변 차량 163대가 타거나 그을렸고, 지하 통신시설은 엉망이 됐다.두 달 전 인천 청라 아파트 ‘벤츠 전기차 화재’에 못지않은 피해를 준 사건이지만, 아무런 이슈가 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가솔린 차에서 난 불이어서다. 별로 새로울 게 없는 뉴스다 보니 다들 그러려니 넘겼을 터다. 그래서 ‘90% 이상 연료통을 채운 차, 지하 주차장 진입 금지’ 같은 황당한 대책은 뒤따르지 않았고, 당시 스프링클러 미작동 이유를 추궁하는 ‘정상적인’ 후속 절차가 이어졌다.지하 주차장, 큰 피해, 스프링클러 미작동 측면에서 판박이 사고였지만 벤츠 전기차 화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전기차에 ‘달리는 시한폭탄’이란 프레임을 씌우자 서울시는 뒤도 안 돌아보고 ‘90% 이상 충전한 차, 지하 주차장 진입 금지’를 발표했다. 완성차 메이커, 배터리 기업, 관련 전문가들의 비웃음과 반발을 산 바로 그 대책이다.반발 이유는 명쾌하다. 국산 전기차에 주로 들어가는 삼원계(NCM) 배터리는 g당 최대 275㎃h 정도의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데, 배터리 제조사는 200~210㎃h만 쓰도록 설계한다. 자동차 회사는 여기에 더해 ‘100% 충전’으로 계기판에 떠도 실제론 95% 정도만 충전되도록 안전마진을 둔다. 그럼에도 문제가 생기면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이 차단·제어한다. 3중 안전장치를 둔 만큼 충전율 규제를 추가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배터리 전문가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인데, 서울시는 왜 엉터리 대책을 내놨을까

    2024.10.01 17:59
  • 예정된 미래에 베팅하라…G5로 가는길 '7대 新산업'이 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첫 번째 조건은 경제력이다. 핵심 동력은 기업이다. TSMC가 대만 국부(國富)의 핵심이듯이 모든 나라에는 경제를 선도하는 대표 기업이 있고 그들이 구축한 생태계에서 일자리와 세금이 나온다. 우리도 그랬다. 삼성 현대 SK LG 등 ‘보석’ 같은 기업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60년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2040년 국내총생산(GDP) 더블링(2400조원→5000조원)’ 달성을 위한 키플레이어가 기업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을 둘러싼 글로벌 기업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서다.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한국을 먹여 살려온 주력 산업은 하나둘 중국에 따라잡혔고, 인공지능(AI) 로봇 우주 양자 등 미래 첨단 분야에선 미국과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이런 식의 위기는 처음이 아니다. 미국 일본 유럽에 비해 디지털 후진국이었지만, 우리는 1990년대 세계 최초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을 상용화하고 초고속 인터넷망도 전국에 깔면서 순식간에 정보기술(IT) 강국이 됐다. 삼성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던 일본 기업을 차례차례 무너뜨렸고, LG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목돈을 투입해 2차전지 최강 기업 중 하나가 됐다. 그렇게 별 볼 일 없던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산업 강국이 됐다. 한국 미래, 신성장 동력에 있다다시 저성장의 굴레를 벗고 고성장 궤도에 올라타려면 유망 산업부터 품어야 한다. 20여 년 전 신사업이던 휴대폰과 LCD(액정표시장치) 시장을 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미래 유망 산업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AI와 로봇, 바이오, 우주항공, 수소, 첨단 모빌리티, 차세대 원전 등

    2024.09.23 18:06
  • 7대 미래산업 10%만 잡아도 'GDP 더블링'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것은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1974년이지만, 사업을 본격화한 것은 1983년부터다. “가전용 반도체가 아니라 첨단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는 이병철 회장의 ‘도쿄 선언’이 그 출발점이다. 삼성은 도쿄 선언 10년 만인 1993년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점유율 10.8%)에 올랐다. 그 무렵 현대자동차는 미국 진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1986년 ‘올리브에이스’호에 실린 엑셀 1050대로 닻을 올린 미국 수출은 약 5년 만인 1990년 누적 100만 대를 넘겼다. 포스코는 1984년 15억달러이던 수출액을 1993년 43억달러로 세 배 불렸고, 현대중공업을 필두로 한 조선사는 1993년 ‘넘사벽’ 일본을 제치고 세계 챔피언(점유율 37.8%)이 됐다.기업들이 뛸 때마다 대한민국 경제는 쑥쑥 컸다. 1984년 78조원이던 국내총생산(GDP)은 1989년 165조원으로 ‘더블링’됐고, 1998년 315조원으로 다시 두 배가 됐다. 당시 첨단산업이던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을 ‘우리 것’으로 만든 덕분이다.지금 다시, 새로운 거대시장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 인공지능(AI), 바이오테크, 우주항공, 로봇, 수소, 첨단 모빌리티, 차세대 원전 등 7대 미래산업이다. 지난해 기준 737조원짜리 세계 시장의 14%를 한국 몫으로 챙기고 있는 반도체 신화를 이들 미래산업에서 재현해야 한다. 2030년 합산 시장 규모가 약 57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7대 미래산업의 10%만 잡아도 ‘2040년 GDP 더블링’(2400조원→5000조원)과 ‘G5(주요 5개국) 진입’은 현실이 될 수 있다.기존 주력 산업은 더욱 고도화·첨단화해야 한다. 중국에 따라잡힌 범용제품은 과감히 버리고, 고부가가치 제품에

    2024.09.23 17:57
  • [이슈프리즘] "당신 자녀, 공대에 보내겠습니까"

    나라 걱정을 많이 하는 걸로 치면 기업인도 정치인이나 관료 못지않다. 업종 불문, 규모 불문이다. 누군가는 “규제를 내버려두면 기업들의 탈(脫)한국은 가속화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이는 “정부가 인센티브 없이 방치하면 산업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거품을 문다.여기까지는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듣던 얘기 그대로다. 요즘 만난 기업인들은 하나를 더 붙인다. 사람이다. 안 그래도 저출생 여파로 대졸자 수가 확 줄었는데, 그나마 똑똑한 인재는 죄다 의대로 가니 마음에 쏙 드는 이공계 출신을 들이는 게 너무나 힘들어졌다고 하소연한다. 공들여 키운 엔지니어마저 돈에 이끌려 해외 기업으로 옮기니,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대한민국호(號) 침몰은 피할 수 없을 거란다.얼마 전 만난 정보기술(IT) 기업 최고경영자(CEO)도 이직 얘기가 나오자 한숨부터 쉬었다. “미국 빅테크들이 연봉 3억~4억원 정도를 내밀 때만 해도 젊고 똑똑한 인공지능(AI) 엔지니어들은 ‘주판알’을 튕겼어요. 언어장벽과 고위직 승진 가능성, 높은 물가 등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 많은 이들이 한국에 남았죠. 하지만 ‘AI 인력 쟁탈전’이 불거지면서 완전히 달라졌어요. 10억원을 준다는데, 무슨 수로 막습니까. 사실상 연공서열제에 묶인 우리는 잘해야 1억~2억원인데….”그러고 보니 삼성전자건, SK하이닉스건 특급 기술을 개발한 젊은 엔지니어에게 깜짝 놀랄 만큼의 ‘파격 보상’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평등’을 외치는 노조와 목소리 큰 일반 직원들의 눈치를 본 탓인지, 다들 똑같이 적용받는 임금인상률과 사업부별 실적 및 개인 고과 등을 감안

    2024.08.22 17:49
  • [이슈프리즘] 아디다스, SK 그리고 '백 투더 베이식'

    사람들은 시련을 딛고 재기한 기업 스토리에 열광한다. 다 망해가던 PC업체에서 세계 최고 정보기술(IT) 기업이 된 애플과 무너진 ‘TV 왕국’의 영광을 게임, 엔터테인먼트 등 콘텐츠로 재현한 소니에 그랬다.여기에 추가할 만한 기업이 하나 더 나왔다. 만년 2위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다. 31년 만에 연간 적자(5800만유로)를 낸 게 불과 1년6개월 전인데, 올해는 10억유로 흑자를 낼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사이 주가는 두 배로 뛰었다. 요즘 아디다스는 그만큼 ‘핫’하다.이 모든 변화는 푸마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축구선수 출신 최고경영자(CEO) 비에른 굴덴이 ‘구원투수’로 온 작년 초 시작됐다. 굴덴이 어떤 특별한 마술을 부린 걸까. 그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중요한 과제는 ‘우리는 지고 있다’는 걸 직원들에게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휴대폰 번호를 전 직원 6만 명에게 공개하고, 시도 때도 없이 소통했다. 그렇게 변화를 원하는 직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굴덴이 찾은 위기 탈출 해법은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만 찾던 조직문화를 ‘일단 해보자’로 바꾸는 것, 그리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백 투더 베이식)이었다. 스포츠 브랜드가 스포츠 후원을 포기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며 한동안 포기했던 크리켓과 럭비 등을 다시 품었다. 항상 “현장을 챙기라”고 주문했고 “판단이 서면 우물대지 말고 바로 실행하라”고 채근했다. 할인 최소화, 재고 감축, 비용 절감 등 누구나 알지만 실제 하기는 힘든 일에 매달렸다. 한동안 놓친 ‘경영의 기본’을 다잡은 게 아디다스 재기의

    2024.07.22 17:18
  • [이슈프리즘] 똑같은 사고, 韓·美의 다른 대응

    모든 기업은 숙명처럼 ‘사고’를 안고 산다. 예방에 힘을 쓴다고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란 말뜻 그대로, 사고는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불쑥 터진다. 이런 ‘불청객’이 금호타이어를 찾아온 것은 2016년이었다. 미국 조지아 공장 완공을 코앞에 둔 시점에 지붕 마감 작업을 벌이던 현지 채용 근로자가 추락사한 것. 당시 미국법인에서 일한 한 임원은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근로자 안전 문제에 엄격한 미국에서 사망사고가 난 만큼 제때 공장 문을 여는 것은 물 건너갔다는 걱정에서였다.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출동한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HSA) 소속 근로감독관은 금호타이어 임직원에게 하나하나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규정에 맞게 안전교육을 했는지, 보호장비를 제대로 착용토록 했는지…. 한참을 살펴보던 근로감독관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왔다. “사고 원인은 해당 근로자가 임의로 안전로프를 매지 않은 것이다. 금호타이어는 해야 할 조치를 다 했으니, 하던 대로 시험생산을 계속해도 좋다.” 그렇게 금호타이어는 사고 당일에도 공장을 돌릴 수 있었다.똑같은 사고가 한국에서 일어났으면 어땠을까.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은 “한국에선 사망사고가 나면 거의 100% 작업중지 명령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실제 몇 년 전 A기업에서 추락사고가 났을 때 감독관이 제일 먼저 내린 조치는 모든 고소작업(高所作業)에 대한 작업중지 명령이었다. 사고 원인이 뭔지, 추가 사고가 날 수 있는 급박한 위험 요소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문제는 한 번 작업중지 명

    2024.06.12 17:57
  • [이슈프리즘] "기술 배우자" 중국 가는 韓기업들

    “중국에 연구개발(R&D)센터를 지을까 검토 중이에요. 기술 개발 속도로 보나, 연구 환경으로 보나 한국보다 훨씬 낫거든요.”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까지 한국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던 첨단업종에서, 그것도 첫손에 꼽히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입에서 “중국에 ‘두뇌’를 두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한국에 꼭꼭 숨겨둔 기술도 빼가는 중국인데, 본토에 R&D센터를 세우면 기술 유출 가능성이 높아질 게 뻔할 텐데 말이다.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더니 이런 설명을 들려줬다. “기술 유출 걱정, 별로 안 합니다. 중국이 더 잘하거든요. R&D센터 지으려는 것도 중국 기술을 배우려는 겁니다.”이 한마디가 한국경제신문이 지난주부터 내보내고 있는 ‘레드테크(중국의 최첨단 기술)의 역습’ 시리즈를 기획한 배경이 됐다. 중국의 첨단기술 수준을 짚어보고, 단기간에 실력을 끌어올린 비결을 찾기 위해 화웨이, 바이두, 텐센트 등 최고 테크기업을 찾았다.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정도만 빼면 중국은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조차 안 한다. 중국 기업인들 머릿속엔 온통 미국을 잡는 것만 들어 있더라.”중국의 ‘첨단기술 굴기’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올 들어서만 “2022년 기준 중국의 136개 핵심 기술 수준이 미국 대비 82.6%로 한국(80.1%)을 처음 눌렀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고, “64개 첨단기술 경쟁력에서 중국이 53개 부문 1위로 미국(11개)을 앞섰다”는 호주전략정책연구소 분석도 나왔다.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중국 제조 2025’를 발표한 2015년이었다. 정보기술(IT), 로봇, 항공우주 등 10개 첨단 분

    2024.04.30 18:14
  • [이슈프리즘] 기업 홀로 '반도체 전쟁' 하라는 나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원재료인 웨이퍼를 흔들며 “반도체 패권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게 3년 전 이맘때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엔 가지야마 히로시 일본 경제산업상이 ‘반도체산업 기반 강화 전략’을 발표했다. “민간사업 지원의 틀을 넘어 국가사업으로 대처하겠다”면서.미국과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아차’ 싶었는지, 문재인 정부도 그즈음 대책이란 걸 내놨다. 이름하여 ‘K-반도체 전략’. 거창한 제목과 달리 보조금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시설투자비 등에 대한 세액공제를 ‘찔끔’(대기업 기준 3%→6%, 이후 15%로 상향) 올려주는 정도였다.대책 중에는 SK하이닉스가 120조원을 들여 짓는 용인 클러스터 가동에 필요한 전력 인프라 구축비의 25%를 국비로 지원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전기료를 깎아준다는 것도 아니고, 마땅히 나라가 깔아줘야 할 전력망 구축비를 일부 대준다는 게 그렇게 생색낼 일인가 싶었지만, 그나마도 없던 걸 해준다니 SK로선 황송할 따름이었겠다.한·미·일 세 나라의 ‘반도체 굴기’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이듬해 드러났다. 미국은 자국에 반도체 시설을 짓는 기업에 527억달러(약 70조원) 규모의 보조금 등을 주는 ‘반도체 지원법’을 내놓으며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을 빨아들였다. 얼마 전 나온 ‘인텔 200억달러, 삼성 60억달러, TSMC 50억달러 보조금 지급’ 기사의 근거가 된 바로 그 법이다.같은 해 일본은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대만 TSMC에 건설비의 40%에 해당하는 4760억엔(약 4조3000억원)을 건넸다. 일본 정부의 총력 지원은 덤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24시간 공사&

    2024.03.25 17:53
  • [이슈프리즘] '해자(垓子)'가 사라진 한국 기업

    콘스탄티노플(튀르키예 이스탄불)은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1000년 동안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42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지은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덕분이었다. 5세기 중반 훈족은 이 성벽에 막혀 말머리를 돌렸고, 사라센은 무려 5년(674~678년) 동안 이 성을 포위했지만 끝내 뚫지 못했다. 이후에 침공한 러시아도, 아랍도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였다.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의 힘은 두 군데서 나왔다. 하나는 3개의 성벽을 차례차례 쌓아놓은 3중 구조란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넓고(18m), 깊은(6m) ‘해자’(垓子: 성벽 바깥을 빙 둘러싼 물웅덩이)였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던 침략군들은 눈앞에 맞닥뜨린 거대한 물웅덩이에 진격을 멈췄다.그 옛날 서양 전쟁사를 꺼낸 건 얼마 전 만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A씨가 꺼낸 ‘해자’란 단어가 귀에 맴돌아서다. 최근 CEO로 선임된 그는 임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회사의 해자는 무엇이냐”, “경쟁 업체는 어떤 해자를 갖췄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남들이 파놓은 물웅덩이를 깨부수고, 남들이 못 건너올 물웅덩이를 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A씨는 “똑 부러진 답도 못 들었고, 나도 못 찾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가장 절박한 숙제가 바로 우리만의 해자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우리만의 해자를 찾는 것, 그리고 남들이 파놓은 해자를 뚫는 것은 비단 이 회사만의 일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놓인 상황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어서다.국가대표 산업으로 꼽히는 반도체부터 그렇다. 지금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주인공

    2024.02.22 17:32
  • [이슈프리즘] '기업 氣 살리기' 공약도 보고싶다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주던 기업인 이름이 휴대폰 창에 떴다. 반가운 마음에 받았더니, 웬걸. 걱정만 한가득이다. 그것도 ‘세상 쓸데없다’는 나라 걱정으로만.A씨는 지난주에 나온 두 건의 한국경제신문 기사 때문에 전화기를 들었다고 했다. 18일 게재한 ‘미래 핵심기술 1위, 중국 53 vs 한국 0’과 하루 뒤 보도한 ‘與, 아빠도 한 달 출산휴가…野, 셋째 낳으면 1억 지급’.전자는 인공지능(AI), 배터리 등 64개 첨단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그동안 ‘한 수 아래’로 본 중국과 인도에 크게 밀린 것으로 나타났다는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의 분석 보고서다. 후자는 여야가 동시에 내놓은 저출생 대책 총선 공약을 비교 분석한 기사였고.두 기사가 A씨의 머릿속에 하나로 얽히면서 화를 돋운 모양이다. 한국 기업 경쟁력은 추락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그저 표에 도움이 될 만한 공약만 내놓고 있으니.“저출생 대책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장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정책을 발표하려면 사전에 기업과 협의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기사를 찬찬히 읽어 보니, A씨가 폭발할 만한 대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업 인력 운용에 부담이 될 수 있는 국민의힘의 ‘유급 아빠 휴가’ 확대(10일→1개월)와 ‘유급 자녀돌봄 휴가’(연 5일) 신설이 그랬다. 아이를 낳으면 현금을 퍼준다는 더불어민주당 공약도 기업인 입장에선 찜찜할 만한 부분이다. A씨는 “매년 28조원이 든다는데, 어디서 나오겠느냐”며 “결국엔 법인세, 소득세 올려서 대기업과 고소득자에게 물릴 게 뻔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민주당이

    2024.01.22 17:47
  • [데스크 칼럼] '피터팬'처럼 성장 멈춘 韓 출판사들

    “그 숫자, 진짜 맞나요?”몇 번이나 되물었다. 머릿속으로 짐작했던 수치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설마 그 정도일까’란 의심은 스마트폰으로 관련 자료를 확인한 뒤에야 거둘 수 있었다.7만5324개. 작년 기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출판사 수다. 2012년 4만2157개에서 매년 3000~4000개씩 더해졌으니, 지금 세어 보면 8만 개에 육박할 수도 있겠다.많아도 너무 많다. 5조~6조원 시장에 이렇게 많은 ‘선수’가 뛰는 산업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이 중 상당수가 1인 출판사라고 해도 말이다. 출판시장이 쪼그라드는 걸 감안하면 이 숫자를 이해할 길은 더 멀어진다. 지난해 상위 77개 출판사 매출은 5조1081억원으로, 10년 전(2012년 5조6576억원)보다 10% 줄었다. 7만 개가 넘는 한국 출판사국내 1위 단행본 출판사(참고서 제외)인 김영사의 2012년과 2022년 성적표에 이 모든 상황이 담겨 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출(약 350억원)은 똑같은데, 영업수지는 19억원 흑자에서 5억원 적자가 됐다. ‘업계 1등도 적자’란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출판 분야 ‘챔피언’의 덩치가 우리 산업 전체로 보면 ‘플라이급’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인공지능(AI)이다 빅데이터다 세상은 팽팽 돌아가는데, ‘피터팬’처럼 작은 몸집으로 미래 투자를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 앞선다. 덩치도 키우고 수익성도 끌어올려야 할 텐데, 의미 있는 인수합병(M&A)이나 그럴듯한 신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출판사는 들어보지 못했다. 굳이 리스크를 안고 도전했다가 큰 낭패를 보느니 빡빡하지만 지금 살림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건지….누군가 “다양성을 추

    2023.12.06 18:00
  • '피터팬'처럼 성장 멈춘 한국 출판사들

     "그 숫자, 진짜 맞나요?"몇번이나 되물었다. 머릿속으로 짐작했던 수치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설마 그 정도일까'란 의심은 스마트폰으로 관련 자료를 확인한 뒤에야 거둘 수 있었다. 7만5324개. 작년 기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출판사 수다. 2012년 4만2157개에서 매년 3000~4000개씩 더해졌으니, 지금 세어보면 8만개에 육박할 수도 있겠다. 많아도 너무 많다. 5조~6조원 시장에 이렇게 많은 '선수'가 뛰는 산업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이중 상당수가 1년에 책 한권 내지 않은 1인 출판사라 해도 말이다. 출판시장이 쪼그라드는 걸 감안하면, 이 숫자를 이해할 길은 더 멀어진다. 지난해 상위 77개 출판사 매출은 5조1081억원으로, 10년전(2012년 5조6576억원)보다 10% 줄었다.  5조 시장에 7만 곳 격돌국내 1위 단행본 출판사(참고서 제외)인 김영사의 2012년과 2022년 성적표에 이 모든 상황이 담겨 있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매출(약 350억원)은 똑같은데, 영업수지는 19억원 흑자에서 5억원 적자가 됐다. '업계 1등도 적자'란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출판분야 '챔피언'의 덩치가 우리 산업 전체로 보면 '플라이급' 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인공지능(AI)이다 빅데이터다 세상은 팽팽 돌아가는데, 저 정도 기업규모로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을까. 덩치를 키우고 수익성을 끌어올려야 할텐데, 과문한 탓인지 의미 있는 인수합병(M&A)을 했거나 이렇다 할 신사업에 뛰어든 출판사는 들어보지 못했다. 굳이 리스크를 안고 도전했다가 큰 낭패를 보느니, 지금 살림이라도 유지하는게 낫다고 보는건 아닌지…. 누군가 &qu

    2023.12.06 08:31
  • [데스크 칼럼] 예술이 왜 공짜여야 하는가

    루브르박물관 15유로, 루이비통미술관 14유로, 피노컬렉션 14유로, 오랑주리미술관 11유로….지난주 유럽 최대 아트페어 ‘아트바젤 파리’를 다녀온 이선아 기자의 출장 명세서에 붙은 영수증 뭉치의 태반은 미술관 입장료였다. 다 더하니 제법 뭉칫돈이 됐다. 궁금했다. 한국도 국립박물관·미술관 무료 관람제(상설 전시 기준)를 하는데, 자칭 ‘문화강국’이라고 뻐기는 프랑스가 왜 안 하는지.문화체육관광부에 물었더니 이런 답변을 들려줬다. “2008년 무료 관람을 시범 실시했는데 효과가 없어서 그만뒀다더라. 공짜든 아니든, 미술관 안 가는 사람은 어차피 안 가니까. 괜히 입장료 수입만 줄어들어 세금 축내지 말자는 거지. 그래서 영국 빼곤 웬만한 선진국들 다 돈 받아.”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저 높은 ‘예술 문턱’을 조금이나마 낮추려면 입장료라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외국인 입장료를 우리가 내준다?국립중앙박물관 자료를 찾아봤다. 프랑스와 비슷했다. 무료 관람제를 시행한 2008년부터 첫 3년 동안만 관람객이 늘었고, 이후엔 정체였다. 확실한 건 국공립미술·박물관에 투입되는 세금과 ‘공짜 관람’한 외국인이 늘었다는 것. 국립중앙박물관과 산하기관이 쓴 돈은 2021년 1855억원에서 지난해 2017억원으로 8.7% 증가했고, 같은 기간 외국인 방문자는 1만4000명에서 7만명으로 다섯 배 늘었다. 올 들어선 6개월 만에 7만 명을 넘어섰다. 알다시피 무료 관람은 공짜가 아니다. 박물관 운영에 드는 경비를 누군가는 내야 하니까. 우리는 이걸 세금으로 메우니 결국 우리 국민이 외국인 입장료를 내준 셈이다.무료 관람의 부

    2023.10.29 18:03
  • 예술이 왜 공짜여야 하는가

    루브르박물관 15유로, 루이비통미술관 14유로, 피노컬렉션 14유로, 오랑주리미술관 11유로….지난주 유럽 최대 아트페어중 하나인 '아트바젤 파리'를 다녀온 이선아 기자의 출장 명세서에 붙은 영수증 뭉치의 태반은 미술관 입장료였다. 하나하나 더하니 제법 뭉칫돈이 됐다. 궁금했다. 우리나라도 국립박물관·미술관 무료 관람제(상설 전시 기준)를 하는데, 자칭 '문화강국'이라고 뻐기는 프랑스가 왜 안하는 지.문화체육관광부에 물었더니, 이런 답변을 들려줬다. "2008년에 무료관람을 시범실시했는데, 효과가 없어서 그만뒀다더라. 공짜든 아니든, 미술관 안가는 사람은 어차피 안가니까. 괜히 입장료 수입만 줄어들어 세금 축내지 말자는거지. 그래서 영국 빼곤 웬만한 선진국들 다 돈 받아."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저 높은 '예술 문턱'을 조금이나마 낮추려면 입장료라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외국인 입장료를 우리가 내준다?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자료를 찾아봤다. 프랑스와 비슷했다. 무료관람제를 시행한 2008년부터 첫 3년 동안만 관람객이 늘었고, 이후엔 정체였다. 확실한 건 국공립 미술·박물관에 투입되는 세금과 '공짜 관람'한 외국인이 늘었다는 것 뿐. 국립중앙박물관과 산하기관들이 쓴 돈은 2021년 1855억원에서 지난해 2017억원으로 8.7% 확대됐고, 같은 기간 외국인 방문자는 1만4000명에서 7만명으로 5배 커졌다. 올 들어선 6개월만에 7만명을 넘어섰다. 알다시피, 무료 관람은 공짜가 아니다. 박물관 운영에 드는 경비는 누군가 내야하니까. 우리는 이걸 세금으로 메우니, 결국 우리 국민이 외국인 입장료를 내준 셈이다.

    2023.10.29 11:16
  • [데스크 칼럼] 아이맥스, 뭔지나 알고 규제하십니까

    “극장 편성 담당자들은 가을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연초부터 미뤄놨던 ‘숙제’를 본격적으로 풀어야 할 때거든요.”얼마 전 만난 극장체인 관계자 A씨는 생각지도 못한 스크린쿼터 얘기부터 꺼냈다. 스크린쿼터 때문에 4분기 편성이 엉망이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절 스크린쿼터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K콘텐츠를 전 세계에 팔아치우는 대한민국이 정작 다른 나라 콘텐츠는 막고 있다는 아이러니에.이게 다가 아니었다.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영화관이 아닌 각각의 스크린마다 걸어놓은 탓에 그 귀한 아이맥스(IMAX)관도 1년의 5분의 1(73일)은 무조건 한국 영화를 걸고 있다”는 대목에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10여년 전 노부부의 사랑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아이맥스관에 걸렸던 비밀이 그제야 풀렸기 때문이다. 매년 73일은 한국 영화 걸어야영화팬들에게 아이맥스는 ‘힙 플레이스’다. 일반 스크린보다 몇 배 클 뿐만 아니라 숨은 영상도 볼 수 있어서다. 그중 으뜸은 ‘용아맥’(CGV 용산 아이맥스)이다. ‘미션임파서블7’ 같은 블록버스터가 나오면 좌석은 순식간에 동나고 ‘당근’에선 2~3배 웃돈이 붙는다. 티켓값이 두 배 가까이 비싼데도 그렇다.지금 용아맥엔 아이유 콘서트가 걸려 있다. 콘서트 실황을, 그것도 1년 전에 찍은 걸 1주일째 틀고 있는데도, 용아맥은 올해 숙제를 33일치밖에 못 했다. 연말까지 남은 100여 일 중 40일을 한국 영화로 채워야 한다. 용아맥의 맞수인 ‘코돌비’(메가박스 코엑스 돌비시네마관)와 ‘월수플’(롯데월드타워 수퍼플렉스관

    2023.09.19 18:00
  • '아이맥스'가 뭔지는 알고 규제하십니까

    "극장 편성 담당자들은 가을을 별로 안좋아합니다. 연초부터 미뤄놨던 '숙제'를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풀어야 하거든요."얼마전 만난 극장체인 관계자 A씨는 생각지도 못한 스크린쿼터 얘기를 꺼냈다. 스크린쿼터 때문에 4분기 편성이 엉망이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에 머릿속은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찼다.'아니, 그 옛날 스크린쿼터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K콘텐츠를 전세계에 팔아치우는 대한민국이 정작 남의 나라 콘텐츠는 막는다고?'매년 73일은 한국영화 걸어야이게 다가 아니었다.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영화관이 아닌 각각의 스크린마다 걸어놓은 탓에 그 귀한 아이맥스(IMAX)관도 1년의 5분의1(73일)은 무조건 한국영화를 걸고 있다"는 대목에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10여년 전 노부부의 사랑을 잔잔하게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아이맥스관에 걸렸던 비밀이 그제야 풀렸기 때문이다. 영화팬들에게 아이맥스는 '힙 플레이스'다. 일반 스크린보다 몇 배 클 뿐 아니라 '숨어있는 영상'도 볼 수 있어서다. 그중 으뜸은 '용아맥'(CGV 용산 아이맥스)이다. '미션임파서블7' 같은 블록버스터가 나오면 좌석은 순식간에 동나고 '당근'에선 2~3배 웃돈이 붙는다. 티켓값이 두배 가까이 비싼데도 그렇다.  용아맥에 지금 걸린 '영화'는 아이유 콘서트다. 1년전에 찍은 콘서트 영상을 일주일째 틀고 있는데도, 용아맥은 올해 숙제를 33일치 밖에 못했다. 연말까지 남은 100여일중 40일을 한국영화로 채워야 한다. 용아맥의 맞수인 '코돌비'(메가박스 코엑스 돌비시네마관)와 '월수플'(

    2023.09.19 09:58
  • [데스크 칼럼] 예술 갖고 장난치지 마라

    얍 판 츠베덴이란 이름 들어보셨는지.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에서 17년간 악장으로 일한 특급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미국 최고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하모닉을 5년간 이끈 실력파 지휘자다. 평범했던 홍콩 필하모닉을 ‘올해의 오케스트라’(2019년 그라모폰 어워드)로 올려놓은 주인공이기도 하다.이런 사람이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 온다니,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이 붕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름 전 열린 공식 ‘한국 데뷔전’은 그의 진가를 보여주는 무대였다. “정명훈 이후 주춤했던 서울시향이 다시 날아오를 채비를 갖췄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서울시향 바꾼 츠베덴의 마법대체 츠베덴은 서울시향에 어떤 마술을 부린 걸까. 홍보실에 물었더니 “올 1월 기자간담회 기사를 읽어보라”고 했다. 이런 글이었다. “무대 위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철저한 준비는 필수다. 무대에서 90%의 실력을 발휘하려면 110%의 훈련이 필요하다.” 뻔하지만, 비밀은 강도 높은 연습이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츠베덴의 별명은 ‘오케스트라 조련사’다.임헌정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칠순의 노(老)지휘자는 지난 5월 한경아르떼필하모닉과의 연주회 직전 이렇게 말했다. “영혼을 살찌운다는 점에서 예술도 음식이다. 먹는 거로 장난하면 안된다. 나는 ‘완벽한 연주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음악가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선의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건 절대 봐줄 수 없다.”임헌정은 그렇게 한경아르떼필과 열두 차례 연습했다. 통상적인 연습량의 세 배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ld

    2023.08.0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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