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내가 원하는 세상을 여는 열쇠
“응, 알고 있어.” 요즘 이 말이 조금 무섭게 들린다. 검색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모르는 것이 있을까 할 정도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알고 있다’와 ‘공감한다’는 굳이 따지자면 비슷하기보단 오히려 서로 다른 편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알고 있다’는 교만함이 우리에게 공감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방해했다면 지나친 발상일까?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깊이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공감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면 깊은 슬픔을 느끼는 이를 위로하고, 사소한 이익을 얻고자 타인에게 씻을 수 없는 불쾌함이나 허탈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들이다. 세상에 어떤 일도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추구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이익을 내진 않는다. 존중이나 배려, 신뢰, 공경, 추모 등의 단어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에게 벌어졌을 때 기분 나쁜 일들을 타인에게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공감이다.

그렇다면 일은 어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가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일이다. 일을 하는 데도 공감이 없다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에 대한 나의 공감은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이 질문은 나를 계속 발전시키고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됐다.

그런데 “상대에게 도움이 될 것만 생각하세요”라고 하면 모두가 “그게 고객만족 아닙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죠”라고 말한다.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막상 돌아서면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만 열거하면서 돈은 많이 벌려고 한다. 내 만족을 다 찾고 남는 시간에 고객만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향한 끊임없는 관심만이 만족을 줄 수 있다. 시계소매점을 시작으로 사업한 지 55년째가 됐지만 자신에게 꼭 맞는 나만의 세상이란 것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뭘 얻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뭘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상대방을 만족시킬 무기가 전혀 없음에도 나를 만족시킬 곳만 찾는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사업가는 고객을, 운동선수는 관중을, 요리사는 손님을, 가수는 팬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세상을 살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세상의 문이 열린다.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열쇠를 버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