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번아웃 증후군' 극복해야 할 한국
기력이 없다. 쉽게 짜증이 난다. 일이 잘 안 된다. 온통 무의미해 보인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증상이다. 한 가지 일에 곧잘 몰두하는 사람은 극도의 피로감에 빠지기 쉽다. 말 그대로 ‘타버린 열정’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이 조심해야 할 증상이다. 대충대충 사는 사람은 걸리지 않는다. 번아웃 증후군의 한 특징은 이분법적 사고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정치든 경제든 한국의 국제관계에 번아웃 증후군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한국인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정치는 한·미 동맹을 핵심으로 삼았다. 경제는 대(對)중국 투자와 수출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했다. ‘정치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말이 한국의 생존코드처럼 여겨졌다.

한국과 미국·중국은 전략적으로 모순이 없었다. 고민하고 다툴 일보다는 주고받을 일이 많았다. 미국 주연-중국 조연으로 구소련이 무너진 일이 그랬다. 미국이 만든 국제질서를 중국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세 나라의 경제적 가치 사슬은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한국은 중국에 원료를 수출했다. 중국은 제품을 만들어 미국에 싸게 팔았다. 한국과 중국은 수출로 경제를 키웠고 미국은 물가 걱정 없는 소비형 경제를 유지했다. 소련 연방 해체와 한·중 수교를 맺은 게 1992년이니 지난 25년이 그런 구조였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던 국제관계는 급속히 달라졌다. 정치는 미국하고만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중국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적어도 지난 몇 달 동안은 그렇게 보였다. 경제는 든든한 중국이 있어 안심이라 했는데 시장 환경이 돌변했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대에는 대미 경제관계가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번아웃 증후군의 처방은 간단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국제정치 얘기를 할 땐 미국만 생각하지 말고 중국도 생각해야 한다. 미국하고만 말하지 말고 중국하고도 말해야 한다. 무역과 투자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중국으로만 몰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정치든 경제든 복수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은 반드시 충돌한다.” 국제정치학계 대부인 한스 모겐소 교수의 지적이다. 그의 세력 균형론 관점으로 본다면 미국과 중국은 부딪히기 마련이다. 충돌시간이 언제냐가 문제일 뿐이다. 트럼프의 선거 유세기간, 취임 직후 우리는 늘 그런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런 두 나라가 돌연 해빙 무드를 연출하고 있다. 한국으로선 미국과 중국 관계가 틀어져도 걱정이고 너무 잘 돼도 걱정이다.

미국과 중국은 충돌로 가기엔 정치든 경제든 서로가 서로에게 엮인 부분이 너무 넓고 깊다. 앞으로 양국은 국익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겠지만 역할극에 나설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상정해본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민낯이 드러난 미국은 경제 부활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지정학적으로는 더욱 강력한 리더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한다. 중국은 고속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문제점을 반드시 해결하고 가겠다는 각오다. 세계는 아니더라도 아시아에서만은 존재감을 키우려고 한다.

두 나라는 상대를 탓하기보다 상대의 장점을 벤치마킹하고 상대의 현실적 존재감과 공존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한국이 시급히 할 일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다양한 국제관계 시나리오를 마련하자.

박한진 < 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