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수사책임자에 소송…"강압조사·욕설·가혹행위…공권력이 아니었다"

"과학은 과학이 아니고 공권력은 공권력이 아니었습니다."

10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동관 328호 민사 중법정.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 대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가 뒤늦게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은 강기훈씨는 과거 검찰 조사에서 겪은 일들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도구로 쓰인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질타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7부(고연금 부장판사)는 이날 강씨와 가족이 국가 등을 상대로 낸 3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변론을 열고 강씨의 당사자 신문을 진행했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사회부장을 맡고 있던 1991년 5월 친구이자 전민련 소속인 김기설씨가 서강대 옥상에서 뛰어내려 숨진 이후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됐다.

당시 김씨는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중 진압 경찰에 맞아 숨지자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몸을 던졌다.

김기설씨의 사망으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 벌어지자 검찰은 "사건의 배후를 수사하겠다"고 밝혔고, 며칠 만에 김씨 친구인 강기훈씨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며칠 뒤 강씨는 한 석간신문에서 '분신 김기설씨 유서 필적 다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기사는 검찰이 '전민련 간부 K씨'를 수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전민련 간부 중 K를 이니셜로 가진 사람은 강씨가 유일했다.

수사 당국을 피해 명동성당에 몸을 숨겼던 강씨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은신을 부담스러워하는 주위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공개된 장소가 아니면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하고 검찰의 체포를 받아들였다.

강씨는 이후 검찰 조사에서 잠도 거의 잘 수 없는 상태에서 욕설을 들으며 조사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건 내용에 관해서는 별로 묻지도 않은 채 검사와 수사관들이 나를 욕하는 소리만 들었다"며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데, 10분이 10시간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씨의 설명에 따르면 검찰의 강압적인 조사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강씨는 "네 '애미'(어머니)와 여자친구를 잡아오는 게 어렵지 않다", "너 대신 그쪽에서 무슨 얘길 하겠지" 등 가족과 주변 사람을 볼모로 한 협박에 시달렸다.

검찰 관계자는 숨진 김기설씨의 시신과 부검 사진을 조사실 책상에 가득 늘어놓고 강씨에게 보여주며 "네가 한 짓이잖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진을 보여준 뒤에는 강씨에게 내장탕을 먹였다.

강씨는 "그 일을 겪은 뒤로 비건(채식주의자의 일종)이 됐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자신이 이 과정에서 변호인 조력을 받지 못했고 한두 차례 검사가 바라보는 앞에서 변호인을 만났지만, 형식적인 접견에 그쳤다고 주장했다.

고통은 검찰청 밖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유죄가 선고되자 재판 도중 교도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법정을 떠났던 때를 회상하며 "사실과 너무나 다른 판결을 듣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다음 달 20일 재판을 열고 양쪽 최종 의견을 들은 뒤 심리를 마무리할 방침이다.

한편 강씨는 당시 김씨 유서를 대필한 혐의(자살방조 등)로 구속기소 돼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형을 확정받고 복역했지만, 이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씨와 가족들은 지난해 11월 국가와 당시 수사책임자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감정 실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강씨는 20억원, 강씨의 부인과 두 동생은 3억원 등 총 31억원을 청구했다.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jae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