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생활 영향력 큰 방송·언론 우리말 보존 안전판 돼야"

"요즘 '라스' 재밌다는 말이 많은데 라스 보다가 저한테 그렇게들 빠지시더라고요.'입덕'을 부르는 입덕 유발자 윤종신입니다."

지난주(9월28일) '걸크러시' 특집으로 꾸며진 MBC TV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 고정 MC 중 한 명인 윤종신의 인사말이다.

외래어 오남용을 막고 우리말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는 지적은 많지만, 우리말 변형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인터넷, 모바일 기기의 보급과 맞물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문자의 사용 비중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파급력이 커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분석된다.

특히 인터넷상에서는 도를 넘는 비속어나 무절제한 신조어가 남발되고 있어 정상적인 언어생활을 해친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언어도 변화를 거듭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급격한 변화는 당장 개인 간, 계층 간, 세대 간 소통을 저해하고 더 넓게는 사회통합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방송과 언론 매체가 우리말의 급격한 변형을 막고 언어생활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안전장치가 돼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방송과 언론 매체가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유행어를 분별없이 차용하거나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우리말 변형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 방송가·연예계, 줄임말·외래어·신조어·변형어 남용
'황금어장-라디오스타' MC인 윤종신의 인사말을 풀이해 보자.
"요즘 '라스' 재밌다는 말이 많은데 라스 보다가 저한테 그렇게들 빠지시더라고요.

'입덕'을 부르는 입덕 유발자 윤종신입니다.

"
여기서 '라스'는 '라디오스타'의 줄임말이다.

'무한도전'을 '무도'로, '우리 결혼했어요'를 '우결'로, '정글의 법칙'을 '정법'으로 TV 프로그램 이름을 줄여서 부르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얼마 전 새로 시작한 TV 드라마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캐리녀'로 통한다.

최근 방송가와 연예계에서 널리 쓰이는 '걸크러시'는 영어 'girl'(소녀)과 'crush'(반하다)의 합성어로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멋진 여성을 뜻한다.

'걸크러시'는 우리말에서 마땅한 대체어를 찾기 힘든 외래어로 볼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수용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

하지만 '입덕'은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의미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애니메이션, 게임 등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마니아를 지칭하는 '오타쿠'(御宅)라는 말이 쓰였는데, 최근 한국에 유사한 문화와 함께 유입되면서 '오덕후'로 변형됐다.

'오덕후' 이후 '덕후'라는 약어로 널리 쓰이는데, 이는 '덕질'(덕후 짓을 하다), '탈덕'(덕후 짓을 그만두다), '덕왕'(덕후들 가운데 최고), '혐덕'(덕후를 싫어하는 사람) 등의 파생어를 낳았다.

'입덕'도 그중 하나로 '덕후로 입문한다'는 뜻이다.

결국 윤종신이 언급한 '입덕 유발자'는 시청자들을 '라디오스타'에 열광하는 팬으로 만드는 사람이란 의미로 자신을 추켜세운 것이다.

이 정도면 표준어 사용이나, 맞춤법 준수가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

이날 '라디오스타'에 또 따른 MC로 출연한 보이그룹 비투비 멤버 육성재는 자신을 '심쿵' 유발자로 소개했고, 게스트로 출연한 가수 서인영은 전국의 남자를 공포에 떨게 한 '신상' 마녀, 센 언니들이 인정한 '넘사벽'으로 소개됐다.

'심쿵'은 심장에 쿵 하고 충격이 올 정도로 매료됐다는 의미고, '넘사벽'은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으로 독보적이라는 의미다.

'신상'은 신제품을 뜻한다.

이 같은 '라디오스타'의 사례는 특별히 심한 우리말 변형의 예라기보다 요즘 방송가나 연예계의 비근한 예일 뿐이다.

TV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두루 쓰이는 인터넷 신조어들은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엄지척'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는 모습을 가리키고, '썸'은 연인으로 발전하기 전 단계의 남녀 관계를 뜻한다.

요즘 방송가에서 널리 퍼진 인터넷 유행어 중에는 '츤데레'도 있다.

'츤데레'는 새침하고 퉁명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일본어 의태어인 '츤츤'(つんつん)과 달라붙는 모습을 나타내는 '데레데레'(でれでれ)의 합성어로 겉으로는 쌀쌀맞아 보이지만 속정이 깊은 사람을 의미한다.

◇ 방송, 현실 언어생활 반영…긴장 유지해야
방송가와 연예계에서는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주요 시청자층으로 삼는 일부 TV 프로그램들의 특성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유행어의 사용이나 일정 정도의 파격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시청자들의 현실 언어생활과 정서, 급격한 사회 변화를 도외시한 채 과거처럼 표준어와 맞춤법을 우선시하는 교과서적인 접근을 고집할 수 없다는 얘기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제목은 엄밀히 말해 음절을 밝혀 적는 분철(끊어적기)을 하도록 규정한 한글 표기법에 어긋난다.

사극으로서 연철(이어적기)을 했던 고어의 느낌을 살린 파격이다.

2010년 개봉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란 영화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방송과 언론이 사회적 공기로서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긴장을 언어 사용에서도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들을 방송에 참여시키는 쌍방향 예능을 처음 도입한 MBC TV의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지난해 '흥궈신등판', '쌍의원니뮤ㅠ', '몸빵각ㅋㅋㅋ', '흐하?????', '똥무르(?)바께 안돼요?'와 같은 의미가 불분명한 인터넷 용어를 여과 없이 자막에 지속적으로 사용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권고 조치를 받기도 했다.

◇ 인터넷에서 무절제한 신조어·비속어
사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에서 일어나는 우리말 변형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

의미나 형태의 변형이 심해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뜻을 잘못 이해하거나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

일례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게이'라는 말은 동성애자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다.

'게시판 이용자'라는 뜻이다.

문자메시지나 댓글에 쓰이는 초성만으로 이뤄진 약어도 그냥 봐선 뜻을 알 수가 없다.

'ㄱㄱ'은 'Go Go'의 줄임말로 해보자, 가자는 뜻이고, 'ㄴㄴ'은 'No No'의 줄임말로 아니다를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정도 초보적인 수준이다.

'ㅎㄷㄷ'은 '후덜덜'의 줄임말로 무섭다, 놀랍다는 뜻이고, 'ㄹㅇ'은 '레알'의 줄임말로 진짜로라는 의미다.

'ㅈㄱㄴ'은 '제목이 곧 내용'이란 뜻으로 '냉무'와 비슷하다.

'ㅁㅈㅎ'은 '민주화'의 약어로 나는 너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의미다.

특히 인터넷상에서 만들어지고 퍼지는 비속어들의 폐해가 크다는 지적이다.

'김치녀'는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원래 일본 네티즌들이 사용하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상폐'는 '상장폐지된 여자'라는 의미로 주로 30대 여성을 가리킨다.

'한남충'은 '한국'+'남성'+'벌레'의 합성어로 한국 남자를 비하하는 표현이다.

벌레를 뜻하는 '충'은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새로운 접미사로 다양한 파생어를 낳고 있다.

'급식충'은 급식을 먹는 중고생을 비하하는 표현이고, '학식충'은 학생식당을 이용하는 대학생을 뜻한다.

'맘충'은 유아를 이유로 주변에 피해를 주는 젊은 엄마를 가리키고, '틀딱충'은 틀니를 한 노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 "적극 교정" vs "문화 일부지만 때와 장소 가려야"
이러한 인터넷상의 우리말 변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시각차가 있다.

우선 사회와 언어생활, 특히 청소년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할 때 우리말 오남용을 적극적으로 교정해 나가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

이대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홍보팀장은 "인터넷상에서의 무절제한 비속어나 신조어 남발은 이용하는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말 오남용 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바른 언어생활을 선도하기 위한 방송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대로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회장은 "잘못된 언어습관이 확산돼 말이 문란해지면 전체 사회의 틀이 흐트러지는 것은 물론 자동번역기나 인공지능 같은 첨단산업의 발전도 저해할 수 있다"며 "방송과 언론부터 잘못된 습관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사회상을 반영하는 인터넷 신조어를 무조건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언어생활의 변화를 과거에도 반복돼온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이되, 급격한 변화와 무질서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신 아주대 국문과 교수는 "교과서적으로 말해 문화는 교정의 대상이 아니고 인터넷 중심의 젊은 세대 문화는 또래들에게 수용되는 징표나 표지와 같은 것"이라며 "교정하려고 하기보다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곳과 사용할 수 없는 곳을 구분할 수 있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비속어를 포함한 인터넷 신조어들은 특정 공간, 계층, 세대에서 공유되는 일종의 은어이기 때문에 마치 욕설처럼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지만, 강제로 없앨 수 없고 나름의 효용성도 갖는 문화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언어는 하나의 도구기 때문에 그 자체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자기 언어생활이 적절한지,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서 배려하는 언어생활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abullapi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