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TV '우리 갑순이'·tvN '혼술남녀' 공감 백배

요즈음 '공시생'(공무원시험 준비생)과 주변의 애환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해 눈길을 끈다.

SBS TV의 주말드라마 '우리 갑순이'와 tvN 월화드라마 '혼술남녀'는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의 일상을 사실적이면서도 코믹하게 그려내 공감을 얻고 있다.

이는 극심한 취업난 속에 길을 잃은 젊은 세대들이 공무원시험으로 몰리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 길 잃은 청춘…'N포세대'의 자화상
'우리 갑순이'는 서른이 되도록 교원임용 시험에 매달리며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신갑순(김소은 분)과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인 허갑돌(송재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연인 사이인 갑순이와 갑돌이는 가진 것, 이룬 것이 없어 결혼도 못 하고 정 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해 10년째 사귀는 중이다.

가족에게 무시당하고 돈이 없어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는 둘은 봐주기 힘들 정도로 '지지리 궁상'이다.

1등 신부감인 중학교 교사로 속이고 선 자리에 나가보라는 엄마의 성화에 시달리던 갑순이는 절로 들어간다.

"갑돌아, 우리 합격할 때까지 서로 유학 갔다 생각하고 연락도 하지 말자. 우리가 지금 한가하게 연애질할 때냐. 돈 만원도 없어서 못 만나면서. 우리 흙수저들한테는 연애도 사치야, 낭비, 허영, 과소비"
그러나 갑순이가 털컥 임신을 하면서 상황은 더욱 꼬여간다.

몰래 동거를 시작하지만 가족들에게 알려지면서 둘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되는 일 하나 없어 이리 채이고 저리 밟히던 갑돌이는 결국 아버지 무덤가에서 대성통곡을 하는데, 쏟아내는 신세 한탄이 너무 진솔해 측은지심을 자아낸다.

"나 같은 흙수저 사람 구실 하려면 취직하는 길밖에 없는데, 솔직히 합격할 자신 없어. 해도 안 되고, 하기도 싫고. 근데 포기도 못 하겠어. 여기서 놔버리면 난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는 건데. 공부라도 붙잡고 있어야지. 엄마한테도 갑순이한테도 말 못해요.

아빠 나 좀 살려줘. 합격만 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나 죽어요.

"

갑돌이는 어리숙하고 무능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무능을 개인의 박약한 의지나 불행 탓으로만 돌릴 수 없게 하는 그늘진 현실이 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극심한 취업난 속에 연애, 결혼, 출산은 물론 집 장만, 인간관계 그리고 꿈과 희망까지 포기해 '3포', '5포'를 넘어 '7포 세대'로 불리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대변한다.

◇ 웃기지만 슬픈 노량진 학원가
'혼술남녀'는 공시생들에게 꿈을 파는 서울 노량진 학원가가 무대다.

노량진 학원강사들과 공시생들의 애환을 '우리 갑순이'보다는 훨씬 밝고 경쾌한 톤으로 그려내지만, 문득문득 애잔한 에피소드들이 새 나온다.

9급 공무원에 목숨을 건 동영(김동영)은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남이 먹고 버리려는 도시락 반찬으로 밥 한 그릇을 해치우는 초특급 궁상을 떤다.

어느 날 고시원으로 동영의 예쁘고 착한 여자친구인 주연(하연수)이 찾아온다.

주연은 만난 지 5년째 되는 날이라며 평소보다 시간을 좀 더 내달라고 한다.

짧고 달콤한 데이트를 끝내고 고시원에 돌아온 동영은 이별을 통보하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동영과의 관계를 그만 정리하라는 부모님의 종용에 못 이겨 주연이 보낸 것이었다.

차마 주연을 붙잡지 못하는 동영은 "진작에 놓아주지 못해 자기가 미안하다"는 답글을 남기고 혼술(혼자 술 마시기)을 한다.

그러다 주문하지도 않은 안주를 내오는 선술집 아주머니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듣고 눈물짓는다.

"맨날 같이 오는 그 여자친구가 오늘 돈 맡기고 갔어. 학생 올 때마다 좋아하는 제육볶음 주라고. 그렇게 끔찍하게 챙기는 여자친구가 어딨어. 여자친구 봐서라도 이번엔 꼭 합격해."
'혼술남녀'는 노량진에 갓 입성한 신입강사 박하나(박하선)와 스타강사 진정석(하석진)의 밀고 당기는 로맨틱 코미디에 동영의 친구인 공명(공명), 기범(샤이니 키), 채연(정채연) 등 공시생들의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더해져 웃기면서도 서글픈 노량진 학원가의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현실
드라마 속에서 공시생들의 비참함은 때로 다소 과장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공시생들이 실제로 직면한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냉혹하고 극단적이다.

지난 3월 제주에서 7급 국가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온 한 공시생이 필기시험을 치른 뒤 서울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에 침입해 시험 합격자 명단을 조작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앞서 필기시험 문제지를 훔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이어 5월 광주광역시에서는 신변을 비관한 한 지방의 공시생이 아파트 12층에서 투신한 일도 있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본심이 아니라 주위 시선을 의식해 보는 공무원시험이 외롭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취업준비생 10명 중 4명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인 것으로 파악됐다.

청년층(15∼29세)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시험 준비자는 65만2천 명인데 이 가운데 39.3%가 갑돌이와 같이 일반직공무원 시험을, 5.0%는 갑순이처럼 교원임용 시험을 준비 중이다.

공무원은 학벌, 자격증 같은 스펙과 상관없고 나이 제한이 없어 오로지 시험 성적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어서 취업준비생들에게는 마지막 출구나 다름없다.

게다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인턴, 비정규직 등 '미생'이 늘어나는 민간 기업에 비하면 60세 정년이 보장되는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은 꿈의 직장으로 여겨질 만하다.

전국적으로 40만명에 달한다는 공시생들이 공무원시험에 목을 매는 이유다.

요즘 공무원시험 열풍은 고등학교로 번져 '공딩'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대학을 나온 뒤 백수로 사느니 차라리 대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9급 공무원시험을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해 노량진 학원가로 향하는 고등학생(고딩)들이 늘고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지난 4월 치러진 9급 국가공무원 시험에서는 4천120명을 선발하는 데 역대 최대 인원인 22만명 이상이 접수해 54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16개 시·도에서 모두 275명을 뽑는 7급 공무원시험은 3만3천548명이 지원해 평균 122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abullapi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