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의 자회사 라인(LINE)은 지난달 14일 미국과 일본 증시에 동시 상장했다. 청약증거금이 32조원 몰렸지만 활짝 웃은 곳은 외국계 증권사뿐이었다. 노무라를 비롯한 외국계 증권사들이 라인 상장 주관사를 꿰찼기 때문. 라인 상장 주관사의 수수료 수입은 660억원에 달했다. 미래에셋대우의 작년 한 해 투자은행(IB) 매출 773억원에 육박하는 규모다. 국내 증권사들은 철저히 소외됐다. 해외 상장을 주도할 전문 인력도, 해외 주관을 할 수 있는 면허도, 투자 고객도 없는 ‘3무(無)’ 상태였기 때문이다.
[증권업계 판이 흔들린다] 32조 몰린 라인 상장도 외국계 차지…국내 증권사는 'IB 빅딜 구경꾼'
수수료 낮은 쭉정이 거래에 집중

인수합병(M&A) 자문시장에서 국내 증권사 입지는 더 좁다.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매체인 마켓인사이트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작년 M&A 재무자문 순위 1~5위는 외국계 증권사가 싹쓸이했다. 가장 큰 딜이었던 홈플러스 매각전에 국내 증권사는 하나도 끼지 못했다. 외국계 증권사에 자본시장 ‘텃밭’을 내준 국내 증권사는 ‘제살깎아먹기’로 연명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나금융투자가 중국 안방보험의 알리안츠생명 인수 자문을 하고 받은 수수료가 고작 7억원이었다는 얘기도 최근 증권업계에 화제가 됐다. 57개 증권사들이 수수료 인하 ‘출혈 경쟁’을 벌인 결과다. 김원규 NH투자증권 사장은 “증권업계의 수수료 비즈니스는 한계에 봉착했고 더 이상 증권사의 수익 기반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외국계 증권사 사장은 “자문 수수료 규모가 300만달러(약 35억원)를 밑도는 거래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외국계 증권사의 불문율”이라며 “국내 증권사 간 수수료 경쟁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알짜 시장’을 내준 국내 증권사들은 회사채 인수 주관처럼 높은 사업 역량을 요구하지 않아 수수료가 박할 수밖에 없는 거래에 주로 집중한다.

주식 위탁매매(브로커리지) 사업도 마찬가지다. 거래를 트기만 하면 수수료를 받지 않는 증권사들이 즐비하다. 브로커리지 수입은 지난해 말 증권사 수익의 57%를 차지하는 핵심 먹거리인 데도 그렇다. 최근 5년간 박스권 증시에 ‘파이’도 줄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4조7919억원으로 지난해 동기(5조4299억원)에 비해 11.75% 감소했다.

야성(野性) 상실한 증권업계

모험자본을 공급하는 증권사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조직과 사람 모두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자로서의 야성(野性)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업계 전체가 ‘순한 양’으로 안전 추구 경영만 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특히 은행 중심의 금융그룹들이 그렇다. 계열 증권사를 은행 비즈니스하듯 안전 위주로만 경영하고 있다는 평가다. “회사를 키우고 서비스 품질을 높이려고 그룹에 여러 차례 유상증자와 M&A 지원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금융그룹 계열 증권사 사장들이 입을 맞춘 듯 똑같이 하는 하소연이다.

대기업 계열 증권사도 비슷한 처지다. 증권업계를 평정하겠다는 당초의 ‘야성’은 실종된 지 오래다. 업계 관계자는 “그룹 부실을 키우는 ‘골칫거리’로만 전락하지 말라는 비아냥을 듣고서 의욕이 생길 리 없다”고 말한다. 지난 1분기 연결 기준으로 91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한화투자증권 같은 경우 그런 말도 꺼내기 어려운 형국이다. 삼성증권도 2000년대 후반 홍콩 현지법인 투자 실패를 통해 야성이 꺾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런 가운데 미래에셋그룹의 KDB대우증권 인수, KB금융그룹의 현대증권 인수는 업계 판도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몰고 올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대형화나 차별화로 승부를 걸지 못하면 앞으로 시장과 고객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한국 증권업계 초유의 ‘새 판 짜기’가 본격 시작됐다.

김익환/정소람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