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첫 작품 실패한 뒤 독기 품어
멋있어 뛰어든 일, 빚더미 나앉아
3년 절치부심…유럽 뮤지컬로 승부
엘리자벳·레베카·팬텀 등 잇단 흥행

250억 창작품 ‘마타하리’ 제작
라이선스로 나가는 돈 아까워 시작
실패서 배운 노하우 응축한 작품
요즘은 외국제작자들이 먼저 찾아와요


“당신 누구냐(Who are you)?” 번번이 퇴짜였다. 한국에서 온 무명의 젊은 공연제작자에게 유럽의 유명 뮤지컬 제작사들의 문턱은 높았다. 이렇다 할 성공작도 없이 뮤지컬 공연권(라이선스)을 달라며 찾아오는 한국 청년을 누구도 반길 리 없었다. 면전에 대고 “뮤지컬 제작자 맞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청년은 그의 롤모델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되새겼다.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를 악물고 문을 두드렸다.

그로부터 7~8년이 흐른 요즘, 상황은 역전됐다. 유럽의 주요 제작사뿐 아니라 세계 유명 연출가와 작곡가들이 “이 작품 한번 해보자”며 그를 찾아온다. ‘모차르트’ ‘엘리자벳’ ‘몬테크리스토’ ‘레베카’ 등 유럽 뮤지컬을 국내에 잇달아 히트시키며 공연계 최고 흥행사로 떠오른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41)다.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이제 로버트 요한슨(연출가)이나 프랭크 와일드혼(작곡가) 등 유명 인사들이 같이 작업하자고 찾아올 정도가 됐다”며 웃었다.

쌀 배달, 포장마차, 청바지 장사 … ‘맨손신화’ 꿈꾼 강원도 청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나 충북 제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누구보다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스무 살에 ‘맨손신화’를 꿈꾸며 상경했다. 당시 그의 주머니에 있던 것은 단돈 4700원. “처음 한 일은 쌀 배달이었어요. 종잣돈을 모아 친구 세 명과 논현동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두부 장사, 청바지 도매상 등을 했는데 장사 수완이 좋았는지 하는 일마다 돈을 벌었습니다. 돈이 좀 모이자 2004년에 평소 하고 싶던 공연 제작사업을 시작했어요. 제 눈엔 공연 제작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해 서울 대학로의 한 뮤지컬 연습실에서 체코 뮤지컬 ‘드라큘라’ 영상을 보고는 ‘이거다’ 싶었다. 그 길로 계약금 8000만원을 들고 체코로 날아가 공연권을 따 왔다. 첫 뮤지컬 제작이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40억원을 투자했다. 2006년 4월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 공연했으나 대실패였다. 남은 건 20억원가량의 빚이었다. 회사 문을 닫아야 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투자자들을 피해 6개월간 여관방을 전전했다.

“뮤지컬 제작 공식은 하나도 모르고 도전한 저 자신이 한심했어요. 어느 날 여관방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몰라서 망한 게 너무 억울한 거예요. 한번쯤은 제대로 맞붙은 다음에 그만둬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틈새시장 공략 … 유럽 뮤지컬 바람 일으켜

[人사이드 人터뷰] 정주영 회장 존경하던 산골 청년 엄홍현, 뚝심 하나로 뮤지컬계 '미다스 손'으로
그는 틈새시장을 공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유럽 뮤지컬’이었다.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 흥행작들은 경쟁이 치열해요. 반면 웅장하고 아름다우면서 오페라적인 선율을 가진 유럽 뮤지컬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어요. 저는 유럽 뮤지컬들이 한국 관객의 정서에 맞아 충분히 흥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수년간 발로 뛰면서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마침내 결실을 봤다. 2009년 오스트리아 ‘빈극장협회(VBW)’로부터 뮤지컬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의 라이선스를 따냈다. 2010년 김준수 주연으로 올린 ‘모차르트’는 대히트를 쳤다. 후속작인 ‘엘리자벳’ ‘몬테크리스토’ ‘레베카’ 등도 연이어 대박을 치며 한국에 유럽 뮤지컬 바람을 일으켰다.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와 한국적인 드라마로 EMK뮤지컬컴퍼니만의 ‘색깔’을 내는 데도 성공했다.

올여름에는 한국 초연작인 뮤지컬 ‘팬텀’으로 뮤지컬계의 흥행 공식을 새로 썼다. 이 작품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원작이 같아 아류작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그는 ‘최고의 캐스팅’만이 차별화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소프라노 임선혜, 발레리나 김주원 등 각 부문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예술가를 뮤지컬 무대로 불러들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라이선스 비용을 빼면 ‘팬텀’이 ‘오페라의 유령’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겁니다. ‘짝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EMK의 색깔로 제대로 보여줬다고 자부합니다.”

올리는 작품마다 흥행을 이어가는 엄 대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운이 좋다”는 것. 그는 배우를 섭외하기 위해 새벽에 집 앞에 찾아가 아침까지 기다린 일이 부지기수였다. 최선의 캐스팅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지방 공연을 할 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팀과 회식을 한다.

“저의 가장 큰 장점은 나이가 어린 거예요. 필요하면 배우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어요. 배우들을 ‘선배’라고 부르기도 하죠. 다 같이 만드는 공연에서 한 사람이라도 저를 미워해서 실수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잖아요. 공연이 끝나는 날까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책임은 배우도, 제작진도, 연출자도 아닌 제작자가 지는 거니까요.”

새로운 도전 … 창작 뮤지컬 ‘마타하리’

그는 뼈아픈 실패를 안겨준 ‘드라큘라’ 홍보 책자 속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제가 갓 서른 살이 됐을 때 찍은 사진이에요. 2006년 4월 이 공연을 하고 빚더미에 앉았는데, 정확히 10년 뒤 제 이름을 걸고 창작 뮤지컬을 올리게 됐습니다. 기분이 묘하죠.”

10년 가까이 뮤지컬을 제작하다 보니 창작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로열티, 부가가치세 등으로 수익의 30%가 빠져나간다. 대박이 나도 수익은 기껏해야 매출의 20~30%밖에 되지 않았다. “라이선스료로 지급하는 돈이 너무나 아깝더라고요. 예를 들면 ‘몬테크리스토’의 경우 러시아와 루마니아에는 와일드혼의 작품 말고도 각국에서 창작한 훌륭한 ‘몬테크리스토’가 있어요. 우리도 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창작 뮤지컬 제작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작곡가 와일드혼이 엄 대표에게 ‘마타하리’를 뮤지컬로 제작해보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렇게 작품을 구상하고 준비한 지 3년. 제프 칼훈 연출,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작사가 잭 머피 콤비,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 등 정상급 제작진을 꾸리고 캐스팅도 마쳤다. 이제 완성 단계로, 내년 4월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처음 공연한다. 제작비만 250억원이 들어가는 대형 뮤지컬이다.

“한국 공연이 끝나면 아시아계 뮤지컬 제작사로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도 공연해요. 작품을 공개하지도 않았는데 일본과 독일, 스위스 회사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협의 중입니다. 첫 공연이 있는 주간에는 세계 제작자들이 세계에서 초연하는 ‘마타하리’를 보기 위해 모여들 것입니다.”

엄 대표는 요즘도 1년에 한두 번 힘들었던 시절 머문 그 여관방을 찾아간다. 그때 독을 품었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앞으로 10년 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의 롤모델인 정 명예회장을 다시 언급했다. “저는 그분 발끝에도 못 따라가겠지만, 꼭 하나 그의 뒤를 잇고 싶은 건 있어요. 현대자동차가 세계를 누비듯이 제가 제작한 창작뮤지컬을 세계에서 공연하는 것이죠. 10년 뒤에는 라이선스 뮤지컬은 접고 창작 뮤지컬에만 힘을 쏟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은 씨앗으로 시작한 창작 뮤지컬이 세계로 뻗어 나가 그동안 해외에 지급한 로열티를 다 돌려받게 말입니다.”

■ 뮤지컬 제작자 되려면…
충무아트홀 등 ‘전문 아카데미’ 노크하세요


한국 뮤지컬시장이 커지면서 뮤지컬 제작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아졌다. 뮤지컬 제작자가 되고 싶다면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등은 창작 뮤지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뮤지컬 전문 극장인 충무아트홀의 ‘뮤지컬 전문 아카데미’는 △뮤지컬 창작과정 △공연 프로듀서·매니지먼트 과정 △뮤지컬 배우 전문과정으로 구성된다. 공연 프로듀서·매니지먼트 과정은 작품 기획 및 제작 사례를 바탕으로 실무와 이론을 접목한 교육이 이뤄진다. 월1회 기획 워크숍 수업을 통해 공연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창작과정도 예비 제작자가 들어볼 만하다.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한 ‘극작기초과정’, 작가와 작곡가가 파트너를 찾아 체계적으로 실습할 수 있는 ‘창작협업과정’, 팀별 멘토링을 거쳐 완성한 작품을 리딩 형식으로 발표하며 실제 공연 시스템을 경험하는 ‘무대 워크숍과정’으로 세분화된다. 뮤지컬 ‘빨래’의 추민주 연출가, 김희철 충무아트홀 본부장, 유인수 연우무대 대표, 박민선 CJ E&M 공연사업본부장 등 현업에 있는 전문가들이 강사를 맡아 지도한다.

이미 자신만의 뮤지컬을 창작했다면 서울뮤지컬페스티벌(SMF)의 창작경연 프로그램인 ‘예그린 앙코르’에 출품해 보는 것도 좋다. 당선되면 제작비 1억원과 제작사 매칭, 충무아트홀 무료 대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2012년 수상작인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초연 이후 국내 흥행에 힘입어 일본까지 진출했다. 지난 4월 막을 내린 뮤지컬 ‘난쟁이들’도 지난해 수상한 작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아르코 창작 아카데미’와 ‘작품제작지원 사업’을 병행한다.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면 문예진흥기금사업과 연계해 공연 제작 지원 및 공연장 대여 기회를 준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