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상대로 한 세무조사에 대해 법원이 요건을 강화한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기업 영업의 자유와 법적 안정성을 침해하는 세무조사권의 남용을 막겠다는 취지다.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지난 9월 H중공업이 동울산세무서장을 상대로 낸 1000억원대 법인세 부과처분 취소 상고심에서 “위법한 재조사에 기초해 이뤄진 것”이라며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부산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조사 대상 기간이 2000사업연도로 겹치고 조사 세목도 ‘법인세 외’로 중복되는 이상 두 차례 세무조사의 사유가 달랐다고 하더라도 위법한 재조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세목과 과세 기간이 중복되면 원칙적으로 재조사가 금지된다. 국세기본법 제81조의 4는 △조세탈루 혐의를 인정할 만한 명백한 자료가 있는 경우 △거래 상대방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경우 △2개 이상 사업연도에 잘못이 있는 경우 등에 예외적으로 재조사를 허용하고 있다.

대법원은 또 실제 과세처분이 이뤄지기 전 단계인 ‘세무조사 통지(개시결정)’에 대해서도 재조사에 해당하면 취소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서울지방국세청은 천안에 있는 S사의 2010사업연도 법인세를 조사했는데 감사원으로부터 ‘처분요구’ 지적을 받자 세목과 과세기간이 겹침에도 조사 항목을 ‘본사 지방 이전에 따른 임시특별세액 감면과 관련된 사항’이라고 달아 2차 세무조사를 벌였다.

세무당국은 “세무조사를 끝냈기 때문에 통지결정을 취소해봐야 실익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 1부(주심 김소영 대법관)와 파기환송심은 지난 2월과 5월 세무조사 결정 행정처분 취소 판결을 내렸다. 실제 과세까지 나아가지 않은 세무조사 개시결정도 취소하도록 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재조사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법원의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난해 6월에는 ‘우선적인 세무조사 대상’(옛 국세기본법 81조의 5 제2항)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 기준이 나왔다. 정모씨는 28억여원짜리 부동산을 구입했는데 자금을 남편에게서 증여받았을 것으로 추정한 서울지방국세청장이 이를 우선적인 세무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뒤 과세했다.

그러나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과세를 취소하라는 원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탈세 혐의를 인정할 만한 명백한 자료도 없고, 불성실 혐의를 인정할 만한 성실도 분석 결과도 없다”며 “정씨의 재산현황에 비춰 부동산 취득자금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우선적인 세무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위법하다”고 상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강석훈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대법원은 2000년대 중반에 위법한 중복 조사에 기초한 과세 처분은 취소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최근에 세무조사 절차의 적법성을 강화하는 취지의 판결을 잇달아 선고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조사 절차의 중요성에 대해 기업은 물론 법원도 그동안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며 “판례가 한 걸음씩 절차의 적법성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 재조사

세무당국이 같은 세목과 같은 과세기간에 대해 중복해서 세무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국세기본법(81조의 4)은 원칙적으로 재조사를 금지하고 있다. 단, 조세탈루 혐의를 인정할 만한 명백한 자료가 있거나 거래 상대방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경우, 2개 이상 사업연도와 관련해 잘못이 있는 경우는 예외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