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정영주 씨가 지난달 25일부터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예감’전에 출품한 자신의 작품 ‘도시-사라지는 풍경’ 앞에 서 있다. 김인선 기자
서양화가 정영주 씨가 지난달 25일부터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예감’전에 출품한 자신의 작품 ‘도시-사라지는 풍경’ 앞에 서 있다. 김인선 기자
서양화가 정영주 씨(45)의 한지 콜라주 ‘사라지는 풍경’ 시리즈에는 잊혀져 가는 옛 서울 풍경이 담겨 있다. 완만한 둔덕 위로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가 막 떨어진 어스름한 저녁, 무리를 이룬 집들에선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온다. 작고, 낮고, 낡은 동네 풍경이 아련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시는 그때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오는 17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는 기획전 ‘예감’에 참여하는 정씨를 최근 전시장에서 만났다. 그는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 나의 정신과 문화의 터전이며 역사”라며 “낡았다고 버리고 부수어 버릴 게 아니라 그 가치를 인정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말했다.

정씨가 지난 10년간 판자촌 풍경을 화폭에 담아온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됐다.

“10여년 전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아 바람을 쐴 겸 남산에 올라갔어요. 높은 빌딩 사이로 초라한 판잣집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게 꼭 제 모습 같더군요. 빌딩 속에 숨어있는 판잣집과 그 안에 담긴 추억들을 과감하게 캔버스에 드러내 보이고 싶었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서울 신림동 판자촌을 떠올리면서요.”

그는 120호짜리 캔버스를 완성하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한 달여간 작업했다. 고된 작업이다. 캔버스에 스케치한 뒤 한지를 일일이 구겨 붙이고 그 위에 아크릴물감으로 색을 입힌다. 건축가가 집을 짓듯 벽면, 창문, 지붕 등을 하나하나 붙여 나간다. 군데군데 굴곡진 한지는 나이 든 사람의 얼굴에 팬 깊은 주름마냥 시간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그는 “힘들고 고되게 작업해야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정씨는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로 유학을 다녀왔다.

“해외 유학을 다녀와서 왜 한국 정서가 깊이 새겨진 작품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유학 생활을 통해 저 자신을 돌아봤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어요. 프랑스 미국을 떠돌며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더군요. 스스로에게서 발견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02)734-0458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