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서울 관악경찰서 신림지구대 소속 경찰관들이 지난 26일 0시40분께 사건 현장에 도착해 상황을 살피고 있다. 홍선표 기자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서울 관악경찰서 신림지구대 소속 경찰관들이 지난 26일 0시40분께 사건 현장에 도착해 상황을 살피고 있다. 홍선표 기자
지난 26일 0시20분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인근 ‘순대타운’. 순대전문점 등 50여개 식당과 30여개 홍대식 클럽·감성주점이 몰려 있는 이 일대는 주말 유동인구가 20만명에 달하는 서울 서남권의 대표적인 유흥가다. 관악경찰서 소속 31호 순찰차로 순찰에 나선 신림지구대 소속 전판석 경사는 틈틈이 내비게이션 화면에 뜨는 사건접수 현황을 확인했다.

0시45분, ‘띠링’하는 알림 소리와 함께 방금 들어온 112 신고 내용이 화면에 나타났다. 봉천역 5번 출구 인근에서 술에 취한 승객과 택시기사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는 내용이었다. 전 경사는 무전기를 들고 “31호가 출동하겠다”고 말하며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현장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2분47초. 술을 이기지 못한 승객이 택시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을 뿐 택시기사와의 물리적 충돌은 다행히 없었다. 전 경사는 “지난 2월부터 상황실로부터 지령이 떨어지기 전에 순찰차가 먼저 출동 의사를 밝히는 ‘선응답’ 체계가 도입됐다”며 “이후 골든타임인 3분 내에 도착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의 112 출동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엔 사건 현장과 가까이 있는 순찰차라 하더라도 관할 지역이 아니면 좀처럼 출동하지 않았다. 고질적인 ‘관할주의’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순찰차가 관할 지역 여부를 떠나 자발적으로 현장으로 달려간다. 강력팀 형사들과 교통경찰도 예외가 아니다.

상황실의 지령을 무전기로 듣고 수동적으로 일했던 경찰에서 사건 내용을 내비게이션에서 확인한 뒤 능동적으로 출동하는 경찰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2년 전 ‘오원춘 살인 사건’ 당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피해자의 전화를 받고도 ‘주소가 어디냐’고 되묻고 ‘장난 전화’ 취급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뼈아픈 교훈이 환골탈태의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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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지역만 따지던 관행 없앴더니

서울 31개 경찰서에 접수되는 112 신고는 하루 평균 1만3000건에 달한다. 여름철 주말엔 1만6000건까지 치솟는다. 신촌 강남역 종로 등 유흥가에 있는 지구대 1곳의 하루 출동 건수는 농촌 지역 경찰서의 한 달 출동 건수보다 많다. 지난해 112 신고 출동 건수가 가장 많았던 서울 홍익지구대(3만767건)의 출동 횟수는 전남 고흥 영남파출소(43건)의 715배에 달했다.

쉴 새 없이 112 신고가 몰리는 서울 경찰이 112 출동 관행에 혁신을 시도한 건 지난 2월이다. 강신명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취임하면서부터 ‘112 신고 신속출동제’를 서울 지역 전 경찰서에서 시행하도록 했다. 경찰 창설 이후 반세기 넘게 이어졌던 뿌리 깊은 경찰서·파출소별 관할지역이라는 ‘칸막이’를 걷어내는 게 핵심이었다. 기존에는 112 신고를 통해 사건을 접수하면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지구대·파출소의 차량을 우선적으로 출동시켰다. 2000년대 중반 순찰차 신속배치 시스템(IDS)을 도입하며 사건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순찰차를 보낼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마련되긴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할하는 지역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벅차다’는 일선 경찰관들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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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파출소 사이의 칸막이를 없애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속출동제 도입 직전인 지난 2월에는 살인 강도 날치기 절도 등 중요 범죄의 용의자를 현장에서 체포한 경우가 297건에 불과했지만 5월에는 479건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 24일엔 흉기를 들고 신림동의 한 주택에 침입한 뒤 피해자를 폭행하고 달아나던 무장강도를 근처에 있던 다른 지역 관할 파출소 경찰관들이 1분 만에 현장에 도착, 추격 끝에 검거하기도 했다. 신속한 출동은 강력범죄 해결에 특히 효과적이다. 류미진 서울지방경찰청 112종합상황실 관리팀장은 “살인과 납치, 무장 강도 등과 같은 강력범죄는 사건 현장에 몇 초 먼저 도착하느냐에 따라 피해자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고 말했다.

경찰서·파출소별 관할 개념뿐 아니라 같은 경찰서 내 다른 부서 간 칸막이도 없앴다. 강력·형사팀 형사들이 타고 다니는 형사 기동차와 교통순찰 차량까지 112 신고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지역경찰이든 사복을 입은 형사든 교통경찰이든 일반 국민에게는 모두 똑같은 경찰이라는 인식에서다. 강력팀 형사들을 대상으로 한 112출동 분야 평가에서 상위권을 기록한 오지형 서대문경찰서 형사과장은 “일반 국민들이 평생 살면서 112로 전화하는 경우는 한두 번 정도일 것”이라며 “사건 해결 경험이 많은 형사들이 출동하면 그만큼 현장에서 대응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일선 경찰관들의 아이디어 적극 반영

서울지방경찰청의 신속출동제는 일선 경찰들이 현장에서 찾은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서울 망원파출소에서 근무하는 권상주 경사는 지난해 9월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관내를 순찰하던 권 경사는 성산대교에서 70대 노인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신고자와 계속 통화하며 5분여 만에 사건 현장에 도착했지만 노인은 이미 다리에서 뛰어내린 뒤였다.

당시 성산대교 북쪽에 있는 망원파출소에서 출동한 권 경사가 노인이 자살을 시도한 다리 동쪽 난간으로 가기 위해선 ‘U턴’을 해야 했다. 서울에 있는 19개 한강 다리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리 북쪽에 있는 경찰서에서 관할하고, 터널은 시내 중심에 있는 경찰서가 관할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노인을 구했을 것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던 권 경사는 지난 3월 현장에 빨리 갈 수 있는 경찰서가 교량과 터널을 관할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제안은 바로 받아들여졌다. 지난달 8일부터 중앙선을 기준으로 차량의 진행 방향에 따라 112 신고를 처리하도록 조정된 것이다.

제도 시행 5일 만인 지난달 13일. ‘영동대교에서 한 고등학생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한 청담파출소(강남경찰서 소속)에서 출동한 경찰관이 1분30초 만에 현장에 도착해 투신을 막았다. 기존 관행대로 현장에서 먼 광진경찰서 소속 파출소에서 출동했더라면 시간이 2~3배 더 걸려 구조에 실패했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경찰서별 칸막이 없애기를 계속하려면 개인 성과 평가에 더해 협업의 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순찰차 출동은 빨라졌지만….

신속출동제 등을 시행하면서 112 신고에 따른 현장 대처 능력은 크게 개선됐다. 하지만 일각에선 도보·야간순찰 등은 오히려 부실해진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서울 지역 89개 지구대와 147개 파출소 중 정기적으로 도보 순찰을 하고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순찰차 탑승 인원과 파출소 근무 인원을 제외하면 도보 순찰에 나서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선 경찰서의 한 생활안전과장은 “과거에는 의경들로 구성된 방범순찰대가 생활안전과 소속이라 의경들이 도보 순찰에 많이 투입됐다”며 “지금은 소속이 경비과로 바뀌면서 집회와 경비 업무에 더 우선적으로 투입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서울경찰청은 지난 2월 야간 도보 순찰을 강화하기 위해 범죄 취약 지대에 경찰관 기동대 3개 중대를 투입하기로 했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관련 집회가 늘어나며 이마저도 흐지부지된 상태다.

신상영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제복 경찰관이 자주 보이기만 해도 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며 “자율 방범대를 운영하기 힘들고 범죄율이 높은 곳은 도보 순찰이 꼭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