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내 응급 심리지원 매뉴얼 없고 심리치료 체계도 미흡
전국단위 PTSD 치료와 연구 위해 '중앙트라우마 센터' 설치 검토


특별취재팀 = "이렇게 큰 규모의 심리 지원 활동은 정부로서도 사실상 처음이었습니다.

때문에 구체적 매뉴얼도 부족하고, 피해자들의 정신 건강 관리를 위한 체계가 아직 미흡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세월호 사고 수습 현장에서 심리 지원을 지휘한 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사상 최악의 이번 사고는 비극적 상황에서 실종자 구조·수색이나 부상자 치료와 함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마음 속 상처'를 제대로 달래고 감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뚜렷하게 보여줬다.

특히 구조된 단원고등학교 교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 사건은 역설적으로 '심리 지원'의 필요성이 가장 부각된 사례였다.

이처럼 대형사고 발생시 생존자와 가족 등의 마음을 최대한 빨리 안정시키고 평온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관련 체계를 서둘러 정비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정부 내부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 정부내 응급 심리 지원 매뉴얼 없어…'응급 정신의학' 체계 필요
사고 직후인 지난달 18일 고대 안산병원이 구조된 학생과 교사, 일반 승객 55명의 스트레스 지수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중등도 이상의 '심한 스트레스' 상태로 나타났다.

스트레스 점수(1~10점)의 평균이 7.8~8점에 이를 만큼 우울·불안 증세가 심했다.

이처럼 대형 사고를 목격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큰 위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단기적으로 급성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악몽 등을 통해 사고 장면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거나 신경이 곤두서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쉽게 잠들기 어렵다.

심한 경우 사람을 피해 아예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공황발작·환청·공격성향·우울증을 호소한다.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자의 10~20% 정도는 만성·장기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단계로 진행한다.

과민 상태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건에 대한 기억·꿈이 반복되는 등의 증상이 1개월이상 이어질 경우 PTSD를 의심할 수 있다.

최수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건 후 스트레스를 제 때 치료하지 않으면 자연 회복되는 약 30%를 제외하고 40%는 가벼운 증상, 20%는 중등도의 증상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10%는 증상이 악화되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사고·재난 발생 초기 정부와 사회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정신·심리 지원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달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 복지부는 경기도와 함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간호사·임상심리사 등을 중심으로 '심리지원팀'을 구성, 고대 안산병원에 급파해 구조된 학생들의 정신·심리 치유에 나섰다.

다음날인 17일에는 국립나주병원이 꾸린 심리지원팀도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가 현장에서 피해자와 가족들의 안정을 도왔다.

정부는 또 복지부·교육부·여성부·소방방재청 등 관계기관 회의를 통해 '중앙 재해 심리지원단'을 꾸려 국가 차원의 대응 체계를 갖췄다.

이 회의에서 정부는 정신·심리 치유 대상을 피해 학생과 유가족뿐 아니라 단원고 전교생과 교직원, 안산시 주민 전체로 규정했다.

부처별로는 교육부가 단원고 전교생·교직원, 복지부는 그 외 학부모·유가족·지역주민에 대한 심리지원을 책임지기로 했다.

나름대로 초기 대응에 최선을 다했지만, 혼선과 고충도 적지 않았다.

현재 정부 안에는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한 심리 지원 관련 매뉴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큰 틀에서 부처간 업무 분장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세부적으로 심리지원팀을 어떻게 구성할지, 어느 의료기관이 주도적으로 나서야할지 등은 기존 매뉴얼이 없어 그 때 그 때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복지부 등 관계부처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현재 법률상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정신·심리 측면의 응급의료' 체계를 갖출 계획이다.

정부 관계자는 "앞으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고쳐 '응급정신의학'의 개입 근거를 마련하고, 응급의료기본계획에도 관련 내용을 추가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 트라우마 10년이상 갈수도…日·美 등 전문센터 두고 환자 장기 관리
이 같은 정신·심리 응급처치에도 불구, 결국 PTSD 등 후유증이 남은 환자들은 수년~수십년에 걸쳐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야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PTSD가 저절로 회복될 가능성은 작고, 10년이 지난 뒤에까지 약 40%의 환자에서 PTSD가 계속 관찰된다는 보고도 있다"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장기간 지속되면 우울증 등 다른 정신장애까지 동반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1998년 케냐 나이로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피해자 관련 연구를 보면, 사고에 따른 PTSD 환자를 2년이상 추적 관찰한 결과, 2년 이후까지 70% 정도의 증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국내 사례로 사상자가 약 240명에 이른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의 피해자 중에서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악몽 등의 증상을 겪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상당수 선진국들은 이런 대규모 PTSD 관리를 위해 전문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직후 세워진 일본의 '효고현 재난트라우마 센터'가 대표적이다.

이 센터는 고베 지진 피해자를 추적, 상담할 뿐 아니라 '재해지역 정신보건의료 활동 지침' 등 재난 관련 실무 가이드라인을 제작·홍보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PTSD 관련 연구도 활발한데, 주로 ▲ 재난 생존자 집단의 PTSD 연구 ▲ 일회·반복성 외상 사건 생존자 개인의 PTSD 연구 ▲ 스트레스 유발 정신장애 예방 연구 등의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1989년 설립된 미국 국가보훈처 산하 '국립 PTSD 센터'도 마찬가지이다.

당초 이라크 파병 미군의 PTSD와 관련, 정책 수립 등을 지원할 목적으로 탄생한 이 기관은 ▲ PTSD 연구 ▲ 재난 심리안정요원 가이드라인 제작 ▲ PTSD 증상 측정도구 개발 ▲ PTSD 전문가 양성·임상훈련 등을 통해 국가 차원의 주요 PTSD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이 밖에도 '외상후 정신건강센터'를 정부와 멜버른 대학이 함께 운영하며 재향군인의 PTSD 등을 연구하는 오스트레일리아, 1982년 레바논 전쟁 당시부터 국가적 PTSD 지원을 시작해 체계적 PTSD 지침서 등을 보유한 이스라엘 등도 모두 트라우마 관리 모범국이다.

늦었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우리 정부도 이들 해외 사례를 참고, 지난 1일 사실상 첫 국립 PTSD 전문 기관인 '안산 트라우마센터'의 문을 열었다.

센터는 우선 세월호 실종자·희생자 가족을 대상으로 가정 방문을 통한 심리 지원에 나선다.

또 50여개 안산시 중·고등학교를 찾아 학생과 교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진단하며 상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일반 안산 주민들에게도 PTSD·우울·불안 등의 진단, PTSD 고위험군 사례 관리, 자살 대응 24시간 콜센터 운영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부 관계자는 "안산 트라우마 센터를 일단 최소 3년 이상 유지할 방침인데, PTSD가 10년 이후까지 지속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상설 기관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 전국 단위의 심리 지원과 체계적 PTSD 연구를 위해 국립서울병원에 가칭 '중앙 트라우마센터' 또는 '중앙 심리외상지원센터'를 설치·운영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번 참사처럼 큰 사고가 터졌을 때, 지역건강증진센터 등과 연계해 정신·심리 지원을 총괄 지휘할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지적을 반영한 것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