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설국열차
정부는 민영화가 아니라고 한다. 겁을 먹은 때문이다. 그래서 깐을 보고 달려든다. 원칙을 버리면 기회주의가 고개를 든다. 97년 위기체제가 요구했던 4대개혁 중 공공부문과 노동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조직 노동자가 비조직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존하는 악(惡)’이 구조화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착취하고 상층이 하층 근로자의 살을 뜯어먹는다. 이것이 한국의 계급구조다.

한국의 노동자 조직률은 10% 선이다. 세계 최하위다. 그러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다. 광화문 네거리를 제멋대로 점거해 귀청이 찢어지도록 틀어대는 확성기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요 천방지축이다. 한국이 세계 노동운동계의 보루라는 것이 그들의 허무 개그다. 절규라고? 무슨 말씀들이신지. 그들은 절규할 수준의 궁박한 처지가 아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목을 틀어쥐고, 설국열차의 앞칸에 앉아 뒤칸의 동료들을 착취한다. 앞칸의 파일럿 노조가 파업을 벌이면 뒤칸의 스튜어디스와 기내식 비정규직들은 영문도 모른 채 월급이 깎여 나간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벌이면 그때마다 뒤칸의 하청 종업원들 몫이 줄어든다. 앞칸의 철도노조 평균 급여는 7000만원 선이다. 다음 칸의 선박항해사가 4300만원, 그 다음 고속버스가 4000만원, 시내버스가 3600만원이다. 마을버스에 이어 택시기사는 마지막칸이다. 설국열차다.

그러나 대중들은 여전히 이들 귀족노조를 약자라고 착각한다. 약자 편향적 시각을 일컫는 언더도그마 현상도 이 정도면 지력 문제다. 대학가의 안녕하십니까 소동은 지력 부족이 절절 묻어난다. 귀족노조야말로 그 수혜자요 동음이의어가 만들어 내는 혼란에 기생하는 특권 계급이다. 좌익 정치세력들은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표를 얻어 챙기면서 비리와 부패의 고리를 만들어왔다. 이게 바로 87체제가 만들어낸 위선적인 민중주의 체제다. 대부분 철도노조원들은 자동승진에 공무원 연금까지 받는다. 누가 누구를 착취한다는 것인가.

우리는 일한 만큼 받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좋은 직장에 들어간 행운(존 롤즈는 이를 우연이라고 불렀다)의 결과로 평생의 철밥통을 보장받는 체제를 바보들은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바보들은 민영화로 요금폭탄을 맞는다고 절규하고 있지만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던 괴담은 벌써 지워져버린 그런 뇌다. ‘안녕’ 바보놀음은 철도 시설과 운영에 들어간 35조원의 부채를 누가 갚는지, 적자를 메우기 위한 매년 5000억원씩의 세금폭탄은 과연 누가 맞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런 바보들을 위해 나랏돈으로 등록금까지 대준다. 무식에 투자하는 낭비가 막심하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떼바보의 정치라고 하더라도 산수에 구구단이 있듯이 지식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지식은 결코 1인1표가 아니다. 민영화가 가격을 올린다고 선동하는 것은 자본이라는 추상물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이다. 스웨덴 영국 독일 등 대부분 OECD 국가의 철도가 민영화되었다는 사실, 그 대부분의 국가에서 △요금은 내려가고 △서비스는 개선되며 △이용객이 급증하고 △철도회사가 드디어! 이익을 냈다는 사실은 아예 모른 척한다. ‘뇌 송송’ 광우병 괴담에 “나는 더 살고 싶다”며 울부짖던 애들은 이번에도 울고 있다. “민영화!”하면 곧 바로 “반대!”라는 오답이 튀어나오도록 그들의 머리를 자동반응 장치로 만들어 놓은 지식의 마약상들은 누구인가.

하나의 잘못된 시대를 정리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다. 87체제는 결국 민중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근대화의 일탈이요 탈선 상태를 폭주하는 중이다. 길게 늘어선 지식격차 사회에서 1인1표의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다. 철도 민영화는 열심히 일하는 자가 보상받는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금 국회는 불법 파업에 굴복해 민영화라는 말 자체를 아예 틀어막아 버리려고 한다. 정치는 종종 기득권을 정당화하면서 정의를 틀어막는다. 혁명이라도 해야 하나.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