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는 이제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기기도 직접 만드는 회사다. 우리가 원하는 기기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시기가 올 것이다.”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 하드웨어 제조사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지난해 말 주주들에게 보냈다. 발머 CEO의 이 발언은 지난 6일 미국 델컴퓨터 창업자인 마이클 델이 사모펀드와 함께 델컴퓨터 지분을 사들여 상장폐지하는 거래에 마이크로소프트가 20억달러를 투자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기업과 소프트웨어 기업 간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무너지는 영역 구분

정보기술(IT)업계 관계자들은 “윈도8을 내놓은 마이크로소프트가 델을 통해 여러 종류의 하드웨어를 선보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사업만으로는 IT업계의 빠른 변화를 주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스마트폰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내놓은 구글이 지난해 초 모토로라모빌리티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올해 5월 열리는 구글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구글과 모토로라의 첫 합작품 ‘X폰’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지난해 스마트폰 OS 시장의 62.6%를 차지한 구글이 스마트폰 단말기 제조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는 얘기다.

제조업체들이 소프트웨어 영역을 넘보는 것도 올해 예상되는 트렌드다. 삼성전자는 상반기 중 리눅스 기반 모바일기기 OS인 ‘타이젠’을 발표한다.

타이젠 진영에는 SK텔레콤, 보다폰, 스프린트, 오렌지, 텔레포니카, NTT도코모 등 주요국 통신사들과 칩셋 공급사, 휴대폰 제조사가 대거 참여한다. 안드로이드 OS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선택이다. 블랙베리도 구글이나 MS 진영에 들어가는 대신 자사만의 OS ‘블랙베리10’을 내놓았다.

이영소 한국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 선임연구원은 “IT기기 시장에서 하드웨어와 함께 콘텐츠 만족도를 높이는 일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신사 영역도 무너진다

전문가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되는 생태계에 통신사들도 합류할 것으로 전망한다. 통신사업자들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하드웨어 제조사나 소프트웨어 기업은 통신네트워크 사업에 손을 대는 ‘영역 구분 없는 경쟁’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통신사들은 실제로 네트워크 기능을 결합한 갖가지 하드웨어를 최근 잇따라 내놓고 있다. 김지현 KAIST 정보미디어 경영대학원 겸직교수는 “KT의 유아용 로봇인 키봇 등이 대표적 사례”라며 “스마트폰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통신사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스마트폰을 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글은 이미 미국 시장에서 네트워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7월 초고속 인터넷 및 TV 서비스를 위한 ‘구글 파이버’라는 유선망 서비스를 선보였다. 구글은 미국 전역에서 무료로 무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슈퍼 와이파이’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이렇게 되면 동영상이나 음성 같은 인터넷 데이터를 전송하면서 통신사와 갈등을 빚을 필요가 없다.

김 교수는 “앞으로 5년 내 콘텐츠, 플랫폼, 네트워크, 하드웨어를 다루는 기업 구분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