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국내에 개봉된 영화 중 덴젤 워싱턴 주연의 세이프 하우스(safe house)라는 작품이 있다. 미국 정보기관인 CIA의 비밀 아지트를 소재로 한 영화다. 한국의 정보기관도 영화처럼 첨단 보안시설이 갖춰진 세이프 하우스(安家·안전가옥의 줄임말)를 운용한다. 황장엽 씨도 국가정보원 안가인 서울 논현동의 한 주택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중년 이상의 한국 사람은 안가란 말에서 궁정동이란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성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다 부하에게 살해됐다. 국민들이 처음 듣는 안가란 생소한 단어에는 음습함과 퇴폐스런 분위기가 각인됐다. 이후 군사정권 시절의 안가는 밀실정치와 부패정치의 산실로 통했다. 시국사건을 논의하는 ‘관계기관 회의’가 단골로 열리는 곳이었다. 기업인을 불러다가 겁을 주고 뇌물을 받는 장소로도 쓰였다.

박 대통령이 시해된 곳 옆에 있던 궁정동의 또 다른 안가는 높이 3m의 담장에 10m가 넘는 소나무로 둘러싸여 성처럼 보였다고 한다. 내부에 있는 단층 한옥은 고급 카펫이 깔린 특급호텔과 같았지만,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 때문에 주눅들기 일쑤였다는 게 이곳을 다녀온 사람의 전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타파한다며 1993년 안가를 모두 폐쇄했다. 정보기관이 사용하는 것 말고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판단된 12채가 대상이었다. 궁정동 6채를 비롯해 청운동, 삼청동, 한남동, 구기동 등에 있던 안가는 대부분 공원이나 헌법재판소장 공관 등으로 바뀌었다. 삼청동에 있던 안가 중 한 채를 남겼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중 이곳을 거의 쓰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삼청동 안가를 가끔 이용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사저에 머물렀다. 이명박 대통령만 당선 이후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내부에 있는 테니스코트에서 지인들과 운동을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최근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네 개의 방마다 방탄유리로 된 창문이 있고, 외벽도 방탄기능을 갖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지만 위치가 알려졌으니 이미 안가라고 할 수도 없다. 남몰래 뭔가를 꾸미고 뒷돈을 받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격의없이 사람을 만나고 비공식적인 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성격도 변한 것 같다.

최고 권력자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다. 그렇다고 24시간 허리를 세우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가끔은 두 다리를 펴고 앉아야 하는 게 사람이다. 넥타이를 조금 풀어헤치듯이 숨을 약간이라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대통령에게 제공한다면 안가도 필요한 곳이다.

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