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닭발을 먹지 못한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옻닭을 고아 먹이느라 닭을 근 백 마리쯤 길렀는데, 한번은 산에서 족제비가 내려와 닭장의 닭들을 죄다 도륙을 내버렸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본 이후로 나는 닭고기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됐다.

내 친한 친구 중에 하나는 집안이 술 때문에 워낙 골치 아픈 일들을 많이 겪어서 술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만끽하는 저 황홀한 선계비경을 평생 구경하지 못한다니 가련하고 불쌍할 따름이지만 개인사가 그러하니 어찌하리. 나한테 닭발이나 저한테 술이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와 저한테는 상종할 수 없는 대상이다. 대한민국에서 진보도 결국은 그런 게 아닐까.

어떤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돌도 채 안 됐을 때 집안끼리 싸움이 붙어 일족이 멸문의 위기까지 갔다고 한다. 형제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형은 미국을 오가며 장사를 했고, 동생은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렸다. 서로 이념과 이상이 맞지 않아서 평소에도 다툼이 잦았는데 운명의 그날, 동생이 새벽녘에 형네 집으로 쳐들어가서 무차별 흉기를 휘둘렀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이 다치고 심지어 사망자까지 생겨났다. 두 돌도 안 된 갓난아이 역시 어른들의 발에 짓밟혀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로 살아야 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올해로 예순 다섯이 됐다. 회고담을 들어보면 그는 퍽이나 고단하고 한 많은 일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문중은 그 일로 와해됐고, 일가친척과는 한평생 담을 쌓았다. 객지에 나와 혼자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단 한순간도 젖먹이 때 겪은 끔찍한 일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하는 일마다 돈을 벌어서 지금은 고향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됐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라면 여전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자식들이 행여 공산주의자와 어울릴까봐 노심초사하고, 학교에서 데모라도 할라치면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며 자식들을 다잡는단다. 그에게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진보와 좌파가 모조리 하나의 단어 ‘빨갱이’로 인식되는 그만의 영원한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trauma)’가 있다. 이것을 과연 그의 잘못이라고 나무랄 수 있을까.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올해로 예순 다섯인 그는 대한민국이다. 지금 노인들은 대부분 6·25전쟁을 몸으로 겪었다. 건국하고 2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발발한 그 전쟁으로 남한에서만 2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으니 그쯤 되면 유전자 속에 각인된 상처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상처를 건드리는 용어가 곧 ‘빨갱이’이다.

한국에서 ‘빨갱이’란 모든 악의 근원이자 최고봉이며, 본래의 뜻인 ‘공산주의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속에 서로 다른 인자들이 녹아 있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를 세분하려 들지 않는다. 산업화 시기에는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한 사람들도 빨갱이로 내몰렸다. 시골에서 논밭 팔고 소 팔아서 자식들 공부시킨 부모들은 자식이 데모만 하면 빨갱이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60여년 역사에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망치는 가장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빨갱이인 것이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제도와 문물이 똑같은 나라는 하나도 없다. 미국과 일본의 자본주의가 다르고, 러시아와 북한의 사회주의가 다르듯이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특성이 있다. 이는 나라마다 녹아서 흐르는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의 대상이 아니므로 누가 나서서 가르치거나 뜯어고칠 문제도 아니다. 단지 실상을 직시하고 명확히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 공은 진보 진영으로 넘어갔다. 한국의 진보도 하루빨리 태생적인 우리만의 역사관으로 복귀해 한국형 진보정치를 창조해야 한다. 술을 못 먹는 집안의 후손이면 적어도 왜 술을 못 먹느냐고 부모에게 삿대질을 하며 대들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알면 ‘종북’과는 결별함이 옳고, 민심을 얻으려면 명철함을 넘어서는 표독함을 버려야 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역사는 한쪽 바퀴로도 잘 굴러가는 법이니까.


김정산 < 소설가 jsan1019@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