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겨울, 방문취업(H2)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조선족 장모씨(61·서울 대림동). 지난 9월로 비자 유효기간(4년10개월)이 끝나 불법체류자가 됐다. 비자 만료와 동시에 중국으로 돌아가 1년을 기다린 뒤 비자 재신청을 하면 한국으로 재입국할 수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재신청 연령 제한(55세 미만)에 걸려 사실상 재입국이 불가능해 그냥 눌러앉았다. 당장 중국으로 돌아가면 암에 걸린 아내의 병원비와 생계를 책임질 사람도 없었다. 생계를 책임지던 외아들은 교통사고로 몇 년째 몸져 누워 있다.

그는 신분세탁을 미끼로 접근한 비자 브로커에게 사기까지 당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지난 9월, 평소 알고 지내던 L직업소개소 P사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게 화근이었다. ‘늘어나는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단속이 어려워지자 정부에서 양성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600만원만 주면 법무부 고위 공무원 출신 행정사를 통해 신분세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면초가에 내몰린 장씨는 홀린 듯 600만원을 P씨에게 건넸다. 한 달이 지나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행정사라며 소개받은 사람은 법무부 출신이 아닌 조선족 사기꾼이었다. 합법화 계획이란 것도 거짓말이었다. 장씨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하소연했다.

방문취업비자나 체류기간이 90일인 단기종합(C3)비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눌러앉은 불법체류자들에게 신분세탁을 미끼로 돈을 가로채는 비자 브로커들의 사기 행각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불법체류자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감언이설로 꼬드긴 뒤 돈을 챙겨 잠적하는 전형적인 사기꾼들이다. 현행법 어디에도 불법체류자가 합법체류 신분을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런 ‘가짜 비자 브로커’들은 서울 가리봉·대림·구로동과 경기도 안산·시흥·수원 같은 외국인 밀집지역을 어슬렁거리며 ‘먹잇감’을 찾아나선다. 이들 지역의 직업소개소, 음식점 등을 돌면서 ‘비자 만료로 불법체류자가 된 외국인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 뒤 소개받은 불법체류자들에게 합법화 대행 수수료 명목으로 수십만~수백만원을 받고 잠적하는 것이 전형적인 수법. ‘억울하게 불법으로 전락한 외국인들을 구제한다’며 불법체류자들을 노리는 가짜 종교단체나 사회복지단체도 난립하고 있다.

◆“350만원 내면 1년 내 신분세탁”

지난 28일 기자는 불법체류자들의 신분세탁을 해준다는 서울 방배동의 한 사회복지법인 사무실을 찾아갔다. 건물 4층에 있는 사무실 입구엔 ‘사단법인 ××의료복지협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사무실엔 남녀 직원 6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사무실 내 표준어는 중국 ‘옌볜 말씨’였다. ‘이 협회 서울지부 사무총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별도 상담실에서 ‘합법체류 신분 취득 프로세스’를 설명했다.

순서는 대략 이랬다. 착수금 50만원 납입→‘합법체류 신분 취득 신청서’ 작성, 법무부에 제출→법무부 직원과 전화 면담→잔금 300만원 납입→법무부·보건복지부 주관의 자원봉사활동 프로그램 15차례 참가→법무부에 합법체류 신분 취득 최종 신청→방문취업(H2)비자 발급. 통상 비자를 발급받기까지 1년~1년 반이 걸린다고 했다.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합법화 정책은 없다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묻자, 그는 “그래서 일종의 편법을 쓰는 거다. 600명의 회원에 대한 비자 발급 절차가 이미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불법체류자들 대부분 억울한 사연이 있잖아요. 그런 걸 잘 써서 법무부에 보내면 심사를 거쳐 ‘인도적 차원’에서 비자를 발급해줘요. 저희는 사기 치려는 게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 돕자는 겁니다.” 법무부에 확인한 결과 그가 말한 인도적 차원의 조치라는 것은 지금껏 시행된 사례도, 계획된 적도 없었다. 남자는 대화 말미에 “오는 9일 국회에서 ‘한·중 불우이웃돕기 행사’를 연다. 그만큼 저희 단체가 공신력이 있단 얘기다. 이번 행사에는 우리와 친분이 있는 국회의장, 법무장관, 여야 국회의원 2명도 참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회와 법무부에 확인한 결과 ‘고위급 인사 참석’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취재 도중 만난 또 다른 가짜 브로커는 “1년간 봉사활동 60시간을 채우고 매월 2만원씩 기부금을 사회복지단체에 내야 하는 ‘장기적 방법’도 있지만, 700만~800만원을 내고 한 달 안에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는 ‘단기 과정’도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법무부 간부와 친분 내세워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돈을 떼이더라도 불법체류자 신분이어서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당국의 철저한 무관심과 사회적 편견 속에 기막힌 피해를 당하고서도 제대로 맞서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143만8886명. 이 중 장씨처럼 ‘비자 사기’에 노출돼 있는 불법체류자는 18만479명(전체의 12.5%)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가짜 비자 브로커들에게는 2007년 3월부터 방문취업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올해 4년10개월인 체류기간의 만기가 도래한 7만여명의 조선족은 쉬운 먹잇감이다. 법무부는 방문취업비자가 만료돼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 조선족에 대해 1년 뒤 다시 비자를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중국 내 한국 비자를 신청해 놓은 대기자가 너무 많고, 비자 재신청에는 연령 제한(55세 미만)이 있어 비자 만기가 도래한 조선족 중 불법체류를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짜 브로커들의 주 타깃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짜 브로커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 문제 등 국내 체류 외국인 관리 정책을 주관하는 법무부 출신 행정사를 사칭한다. 그런 다음 “수일 내로 불법체류자들을 합법화하는 전향적인 외국인 정책이 발표된다” “법무부 고위 간부들과 끈이 있다. 합법체류 신분을 얻을 수 있도록 잘 말해주겠다” 등의 감언이설로 한국인보다 정보력이 달리는 불법체류자들을 유혹한다. 법무부는 지난 10년 동안 2003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불법체류자 26만7000명을 합법화한 적이 있다.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이 합법적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같은 양성화 조치는 단기적으로 숫자를 줄이는 효과가 있을 뿐 결국 불법체류자들에게 기대심리만 주고 실패하고 만다는 지적에 따라 정부는 추가 합법화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법무부 체류관리과 관계자는 “정부에서 합법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면서 접근한다면 100% 사기”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하헌형/이지훈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