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사회 의료보험 체계가 확립된 상태에서 의료 산업화를 위한 영리 의료법인 도입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며 “대선 공약으로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만이 병·의원을 개설할 수 있다. 요즘 웬만한 곳에서 개원하기 위해 건물을 임대해서 인테리어를 하고 의료기를 들여놓으려면 기본 비용만 해도 수억원을 훌쩍 넘는다. 여기다가 대도시의 잘나가는 지역이라면 이는 수십억원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러면 의사들은 이 많은 개원 자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할까? 대부분의 의사들은 은행이나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거나 사채를 얻어야만 할 것이다. 아니면 시쳇말로 열쇠 세 개 주는 부잣집과 결혼해야 한다는 우스개가 그래서 떠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누군가 여유자금이 있어 투자할 곳을 찾고 있는데 아주 유능한 의사인 친구가 개원을 준비하면서 도와달라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현행법 아래에서는 병·의원은 영리법인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지분투자를 할 수 없다. 단지 개인적으로 돈을 꿔줄 수 있을 뿐이다. 개원한 병원이 운영이 어려워져도 또박또박 이자를 받아야 하고 정해진 날짜에 상환을 촉구할 수밖에 없다. 반면 투자할 수 있을 경우 병원이 잘되면 배당을 받을 수 있으니 함께 경영을 도와주고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어 의사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개원의들이 환자 진료만 해도 힘겨운데 경영까지 도맡아야 하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고 있고, 따라서 전문화되지 못해 병원 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병원이 이익만 추구하게 된다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영리 의료법인 병원이란 말보다 투자개방형 병원이라 표현하는 게 훨씬 정확한 용어라고 여겨진다.

얼마 전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 강의하러 왔던 한 회계학 교수가 “병원은 채무로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정말 놀랐어요. 인건비가 많이 들어 이익률이 다른 서비스산업에 비해 낮은 편이고 초기 투자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데, 외부 투자를 받지 못하게 돼 있다니 의사들은 모두 빚쟁이가 되겠네요”라고 했던 일이 있다. 한국에서 개인이 설립한 중소병원의 도산율은 공식적으로 13%를 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추산된다. 경영이 어렵게 되면 자신이 빚을 떠안고 다른 의사에게 병원을 넘긴 후,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지방으로 가서 밤낮으로 힘들게 일해 채무를 갚아가는 의사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은행이나 제2금융권에서 의사들에게 별 담보 없이 돈을 대출해 주는 이유는 병원이 망해도 봉직의로 일하며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의사들까지도 투자개방형 병원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주식회사 병원이 허용되면 재벌들이 프랜차이즈 클리닉을 만들어 의료계를 장악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리법인 병원이 허용되면 모든 병원이 그렇게 전환될 것 같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에서 전문의료의 거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대학병원은 현재 당연히 모두 비영리법인이며, 영리의료법인이 허용된다 해서 그 병원들이 주식회사 형태로 갈 수도 없고 갈 이유도 없다. 단지 의료기관 설립 형태에 다양성을 한 가지 더 추가하는 것일 뿐이다.

영리의료법인 병원을 도입하자는 까닭은 투자를 다변화해 의사들의 자금 마련과 경영에 대한 족쇄를 풀어줘 더욱 진료에 전념하도록 해 궁극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김종인 위원장은 그날 포럼에서 일자리는 정부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일자리 창출의 일등공신인 의료기관에 대해 오랜 숙제인 규제라는 전봇대를 뽑아줘서 발전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의료산업화의 시작이다.

백수경 < 인제대학원대 학장, 객원논설위원 skpaik@inje.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