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삼성이 고질적 장례문화 바꿨듯이…
“설렁탕으로 할까요, 육개장으로 할까요.”

1990년대 중반, 이렇게 시작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삼성-현대 양대 그룹의 계열병원이 장례 서비스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던 때다. ‘문화’라는 용어가 무색할 만큼 장례 관습이 엉망이었던 시절, 말끔하게 변신한 영안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 문상객들은 메뉴를 고르라는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목소리에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문상 왔다가 예약하고 돌아간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10여년 전 장례문화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병원 후미진 곳에 위치한 영안실은 늘 어둡고 퀴퀴한 냄새로 진동했고, 밤새 술판과 화투판이 벌어지다 끝내 취한 술꾼과 인근 훼방꾼들로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상주들은 그게 효도라며 며칠이고 날밤을 새워야 했고, 문상객들은 함께 밤을 새우는 게 돕는 거라며 새벽까지 영안실 주변을 서성여야 했다. 고인을 이런 식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며 아파트에서 장례를 치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처럼 더운 여름 가정집에서 상을 치른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뿐이랴. 상주라는 것 자체가 죄였다. 영안실을 잡고, 염을 하고, 입관할 때면 어김없이 촌지를 내밀어야 했다. 장례 절차마다 누군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면 또 돈을 뜯겨야 했다. 고인을 추모하고, 상주를 위로하는 장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와 모순, 누구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바꿀 수 없었던 한심한 과거다.

하지만 그런 장례 관습이 지금처럼 바뀌는 데는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영안실을 뜯어고치고, 촌지 없는 장례문화를 먼저 선언한 것은 삼성서울병원이었다. 그러자 현대의 서울아산병원이 맞장구를 쳤다. 두 병원을 찾은 문상객들은 우리도 점잖게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사실에 서로 흐뭇해했고, 입소문이 나면서 대학병원들이 하나 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전국 구석구석에 장례식장이 생기고, 장례문화가 단숨에 바뀌고 말았다. 고 최종현 SK 회장은 화장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장묘문화 개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대기업의 주도로 이뤄진 대변혁이다. 참 잘 털어낸 우리의 구습이다.

그런 식으로 털어내고 싶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구습이 있다. 바로 결혼문화다. 호텔 결혼식이 금지됐을 때는 그나마 덜했다. 1994년 호텔 결혼식이 다시 허용되고 시간이 흐르자, 과시욕에 다시 불이 붙었다. 결혼식 비용이 하객 1인당 10만원이 넘는다는 특급호텔은 예약이 힘들 정도다. 이제는 15만원이 넘는다는 강남 고급 웨딩홀까지 미어터진다. 예식에만 3억~4억원이 들었다는 혼사가 줄을 잇는다. 청첩을 받으면 축하보다는 부조를 걱정해야 하는 이유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약과다. 수천만원에서 많으면 억대에 이르는 예단을 보내야 한다. 이바지음식이 200만~300만원이고, 하다못해 예단편지 붓글씨가 10만원이라면 할 말은 다했다. 아들을 둔 집은 걱정이 더 크다. 수억원을 들여 집까지 장만해줘야 하니 말이다.

예단과 아파트를 강요하는 집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울며 겨자 먹기다. 내 아이 혼사만큼은 간소하게 치르겠다고 다짐해봐야 별 수 없다. 세태를 한탄할 뿐, 서로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무리수를 둔다.

누가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대통령이 나서 냉수 떠놓고 자식이나 손주들을 결혼시키면 국민들이 감복할까.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쇼로밖에 더 보겠는가.

그래서 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대기업이 나서줬으면 한다. 대기업 임원이라면 사회 지도층이다. 결혼식에 돈을 대입시키는 부류와는 근본이 다르다. 나라 경제를 일으킨 주역들이 이번엔 구습 타파에 총대를 메보자. 대기업 임원이라는 자체가 성공의 증명서다. 뭘 더 과시하고 싶은가. 사돈에게는 예단을 보내지 말라고 하자. 아이들에게 집을 사줄 필요도 없다. 그래도 꼭 해주고 싶다면 사돈과 힘을 합쳐 전셋집이나 마련해주자.

사회를 짓눌러온 후진국형 장례문화를 단숨에 바꿔놓은 것은 대기업이다. 이번에는 결혼문화다. 이건희·정몽구·구본무 회장도 임직원들에게 결혼문화를 우리가 앞장서 바꿔보자고 권유해보자. 직접 모범을 보이면 더욱 좋다. 대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