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환 금고는 물이 들어찬 소금창고 같았다. 두 달 사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신용등급이 10단계나 추락했다. 외국인들은 앞다퉈 돈을 빼갔다. 이때 외환보유액을 확인하는 것은 응급조치의 시작이었다. 한국은행에서 파견온 오진규는 매일 밤 12시, 창구에서 따끈따끈한 숫자를 받아왔다. 런던 외환시장이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밤 12시에 숫자를 받으면 외환일보는 새벽 서너 시에야 완성됐다. 보고서는 김용환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일산에 있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새벽 4시30분께 비서가 그 종이 한 장을 침실 문틈으로 밀어넣으면 어김없이 불이 켜졌다고 했다. DJ가 새벽마다 일어나 숫자를 확인했다는 얘기다.”

《위기를 쏘다》는 ‘한국경제 위기의 해결사’로 불린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험을 적은 책이다. 이 부총리는 외환위기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단장으로 기업 구조조정 5원칙을 제정했고, 1998년부터 2년간 금융감독위원장으로 기업과 은행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2004년 카드대란 때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복귀해 다시 ‘소방수’ 역할을 했다. 세계 경제위기가 계속 불거지는 이 시대에 이 전 부총리의 위기극복 경험과 노하우는 새삼 주목받고 있다.

저자는 기업 구조조정 5원칙을 제정한 배경, 기업과 은행의 구조조정 경과, 대기업 구조조정과 대우그룹의 워크아웃에 얽힌 사연, 카드대란을 극복한 경위 등을 들려준다.

특히 정부정책을 이끈 수장으로서 겪었던 관료들의 위기 극복 과정, 구조조정을 위한 기업가와 노조의 설득 과정, 세계 최초로 은행 평가기준을 마련한 일,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신경전, ‘DJ노믹스’의 틀을 잡은 배경 등도 소상하게 적었다.

그가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이겨낸 비결도 알려준다. 위기를 개혁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구조개혁을 한다는 것은 어항 속 금붕어가 되는 것”이라며 “사심 없이 투명하게 움직일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은 미완”이라고 고백한다. DJ와 마지막으로 독대 자리에서 농업과 공공부문 등으로 개혁을 확대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DJ는 외환위기 사태를 빨리 마무리짓고 싶어 IMF에서 빌린 195억달러를 서둘러 상환하고 “외환위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공공부문은 지금까지 국민의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채비율이 민간의 4~5배가 될 정도로 불어났다고 그는 지적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