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목사보다 밥 사주는 목사가 좋지 않느냐”던 이가 있었다. 목회자도 학벌을 따지는 풍토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이었던 듯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후자가 좋다. 신학 이론에 빠삭한 이보다 함께 식사하면서 형편을 들어주는 목회자가 더 가깝게 느껴지고 기도도 구체적으로 해줄 것 같은 까닭이다.

박사 교수도 좋지만 밥 사주는 교수도 괜찮다 싶다. 한 학기 동안 수강생들의 이름을 외우긴 어렵다. 옷만 바뀌어도 생판 다른 사람 같고 자리도 매번 옮기는 탓이다. 자장면이라도 나누면 누가 누군지 알게 되고, 학생 또한 선생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수업 태도가 한결 진지해진다.

현실은 아프다. 같은 강사라도 박사가 아니면 C급이다. 현역에서 쌓은 경험은 ‘증’ 앞에서 힘을 잃는다. 박사가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대우가 변하는데다 평생 박사로 불린다. 표절과 대필 박사가 넘치는 이유다. 그래도 표절은 범죄다. 대학과 세상이 요구한 결과란 말로 면죄부를 받을 순 없다.

박사만 넘치랴.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부르면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는데’라던 노래가사가 있었거니와 지금은 ‘회장님’ 하고 불러야 할 판이다. 규모에 관계 없이 오너면 회장으로 통칭하게 됐다는 데다 각종 모임 회장도 있으니 열에 열 사람이 아니라 백에 백 사람 죄다 돌아보게 생겼다.

사무총장은 더 많다. 과거 사무국장이나 총무 간사장 등으로 불리던 단체나 모임의 실무 담당자는 언제부터인가 사무총장으로 통일됐다. 회원 20여명인 등산 모임 총무도 사무총장이다. 아무개 사무총장은 길고 어색하니 아무개 총장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낯 간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호칭 거품의 극치는 영웅이다. 서울시가 지난해 가판대마다 환경미화원, 건설노동자, 대중교통기사, 식당아주머니, 직장인들에 대한 표창장을 써붙이면서 ‘서울을 빛낸 진정한 영웅’이란 호칭을 쓰더니 최근엔 ‘헌혈하는 당신이 영웅입니다’도 등장했다. 영웅의 사전적 뜻은 ‘보통사람으론 엄두도 못 낼 유익한 일로 칭송받는 사람’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진정한 영웅’ 운운한 표창장에 대해 ‘그러니 군소리 말고 죽어라 일하라는 건가’라는 인터넷 댓글이 있었지만 아무리 헌혈이 아쉬워도 영웅이란 표현은 지나친 감이 적지 않다. 앞뒤가 맞지 않는 칭찬이 칭찬으로 받아들여질 순 없는 법. 시의 행사나 프로그램에 도통 알기 힘든 영어식 명칭을 갖다 붙이는 이들이 서민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내린다고 좋아하거나 감격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호칭 인플레는 우리 사회에 사람에 대한 이해나 존중은 간데 없고 직함에 대한 대우만 남았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그건 상대를 대우한다기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회장과 사무총장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상대에 대한 호칭이 자신의 계층을 높인다는 식의 착각이 직함인플레를 부추겼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직함이나 직급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사회 전반에 인플레이션 현상이 넘친다며 ‘범(汎)’을 뜻하는 ‘팬(pan)’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팬플레이션’이란 용어를 내놨다. 호텔 룸 명칭에서 딜럭스급은 보통으로 떨어지고 럭셔리, 슈퍼 럭셔리, 그랜드슈퍼 럭셔리 등이 생긴데다 비행기 좌석도 이코노미란 이름 대신 ‘월드 트래블러’와 ‘보이저’ 등 알쏭달쏭한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피자와 커피 역시 스몰을 금기어로 만든 대신 레귤러나 톨(tall)을 사용한다는 설명이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VIP카드 위에 플래티늄카드, 그위에 다시 다이아몬드와 시그니처 인피니트 카드가 만들어졌다. 연회비가 비싼 만큼 혜택이 다양해진다지만 실제론 사용할 일이 많지 않은 만큼 필요하지 않은데도 폼 때문에 선택하는 수가 적지 않다.

호칭도, 상품이나 서비스도 거품이 심해지면 가치는 평가절하되게 마련이다. 명칭이 수수하면 차림과 소비 모두 수수해질 수 있을 테고 괜한 허울이나 겉치레 때문에 신경 쓰느라 힘들 일도 줄어들 것이다. ‘진짜 너무 참 아름답다’고 쓰면 아름답지 않게 느껴진다. 남의 눈치 보느라 많이 배운 척, 힘 있는 척 포장 좀 그만할 때도 됐다.

박성희 논설위원·한경아카데미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