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디너쇼는 늘 흥행 보증수표죠.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공연장에 오시면 TV로 보는 것보다 감동이 10배는 더 클 거예요. 두 시간 동안 함께 즐긴 팬들은 하춘화의 가창력을 새롭게 인정하게 되죠. 추억의 시절로 돌아가는 경험과 함께요. 8500회 공연 기록도 관객들이 그만큼 호응해줬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다음달 6일과 7일 서울 잠실롯데호텔에서 ‘효 디너쇼’를 갖는 하춘화 씨(57)는 자신감이 넘쳤다. 데뷔 51주년이자 디너쇼 30주년을 맞은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 그는 반세기 동안 트로트, 댄스뮤직, 발라드, 민요 등을 넘나들며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대중의 가슴을 적셨다. 가요계 최연소 데뷔, 최다 공연 등 각종 기록을 보유한 그는 대중가수 최초로 박사학위를 땄고, 기부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그를 만났다.

▶디너쇼의 매력은 뭔가요.

“현장에서 다정다감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아요. 대형 공연장이 아니라 호텔 연회장에서 함께 호흡하니까요. 식사를 하다가 의자를 돌려놓고 노래를 듣는 분위기에서는 격식이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디너쇼만 찾는 분들도 있어요. 서울에서는 매년 5월 어버이날 전후와 12월 송년회 시즌에 디너쇼를 갖고, 경주에서는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제주에서는 감귤을 수확하는 가을에 열죠.”

▶주 고객층은 누구인가요.

“어르신들이 주로 오시죠. 자녀들이 효도 선물로 티켓을 사주거든요. 식사를 대접하면서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들려주는 게 어른들께는 최고의 선물이에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공연에 앞서 식사부터 먼저 합니다. 밥을 안 주고 노래부터 부르면 청중이 화를 내요. 게다가 음식 맛이 없으면 노래를 잘해도 박수를 못 받아요. 제가 고기 질을 높여달라고 호텔 측에 꼭 부탁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디너쇼는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던데, 요즘 어떻습니까.

“경기가 좋을 때는 디너쇼가 늘지만, 침체되거나 신종플루 구제역 등으로 사회가 불안할 때에는 취소 사태가 일어나요. 문화와 경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걸 잘 보여줍니다. 이번 디너쇼 예매율이 29일 현재 85%를 넘었어요. 경기 부진과 총선 등으로 예년에 비해선 약간 낮은 편이지만, 그래도 급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요. 디너쇼를 갖는 가수들도 크게 늘었고요.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그만큼 튼튼해졌다고 볼 수 있겠죠.”

▶1980년대 디너쇼가 탄생한 배경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디너쇼는 경제력이 좋아지고 컬러방송 시대가 열린 1980년대 초 처음 등장했어요. 1970년대까지는 게스트 없이 가수가 단독으로 공연하는 ‘리사이틀’이 유행했죠. 흑백TV를 볼 때에는 사람들이 리사이틀에서 화려한 색감을 즐겼는데, 컬러방송이 시작되니까 안방으로 돌아갔어요. 가요계는 차별화 전략으로 식사와 공연을 묶은 형태를 내놨죠. 저는 1983년부터 30년간 매년 평균 두 차례씩 디너쇼를 열고 있어요.”

▶레퍼토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가요가 탄생한 1930년대부터 80년간 시대별 대표 가요를 한자리에서 노래합니다. 가요 현장에서 50년을 활동한 저만이 가능한 레퍼토리죠. 저의 히트곡 ‘물새 한 마리’ ‘영암아리랑’ ‘날 버린 남자’ ‘난생 처음’ ‘호반에서 만난 사람’ 등을 부르면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남진의 ‘가슴 아프게’ 등 시대별 대표 가요도 들려줍니다. 이번 디너쇼에선 폴 앤카의 ‘다이애나’, 비틀스의 ‘헤이 주드’ 등 유명 팝송도 노래할 겁니다. 청중은 젊은 시절의 추억에 흠뻑 빠져들 거예요.”

▶가요계에서 최연소 음반을 발매한 주인공이죠. 말을 배우기도 벅찼을 어린 나이에 노래를 시작했다던데….

“여섯 살 때 음반을 냈는데, 세 살 때 제가 우리나라의 대중가요를 300곡이나 불렀답니다. 제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고모들이 다 적었대요. 예를 들면 황금심 선생님의 ‘알뜰한 당신’, 박재란 선배님의 ‘맹꽁이 타령’ 등 그렇게 기록하다 보니 300곡에 이르렀다더군요.”

▶최다 공연 기록도 갖고 있죠.

“197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1년에 180일씩 공연했어요. 하루 쉬고 하루 공연한 꼴이죠. 많을 때는 하루에 5번까지 리사이틀 공연을 가졌어요. 무대에 오르면 30곡의 노래와 8가지 무용을 선보였고요. 1991년 기네스북에 등재될 때 제 공연 횟수가 8000회 정도였어요. 그 뒤로 시간이 계속 흘렀으니까 지금은 8500회를 넘었죠.”

▶그렇게 무리하다 보면 건강에 이상이 오지 않나요.

“직업병이 있었죠. 높은 구두를 신고 공연하니까 발톱이 새카맣게 피멍이 들었어요. 가죽옷을 자주 입었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등창도 생겼고요. 공연 횟수를 줄이면 다시 회복되곤 했죠.”

▶박사학위 논문은 어떤 내용입니까.

“‘사회 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 정서의 상관성 연구’란 제목인데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구이동이 가속화된 1970년대 대중이 어떤 가요를 좋아했는지를 분석했습니다. 당시에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담긴 가요가 많았어요. 대중은 이중성을 띠었죠. 만남에 대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별에 대한 노래도 좋아하더군요. 기쁨과 슬픔에 대한 노래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이처럼 시대 정신을 잘 반영한 대중가요들은 먼 훗날 문화재로 인정받을 겁니다.”

▶공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고생한 건 말로 다 못해요. 1995년부터 공부를 시작해 11년 만에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성균관대 대학원에 네 번이나 떨어진 끝에 합격했어요. 공부하는 동안 공연을 줄였죠. 어떨 땐 생방송하다가 뛰어가 리포트를 발표했어요. 그때 어려움은 지금도 꿈으로 간혹 나타납니다. 수업 시간에는 졸지 않으려고 맨 앞줄에 앉았죠. 5학기 동안 결석 일수가 3일이 채 안됐어요.”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유는 뭡니까.

“주변사람들은 고생을 왜 사서 하느냐고 만류했어요. 하지만 연예생활을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어요. 우리 자매들이 다 박사거든요. 대중음악 전문학교를 만드는 게 마지막 꿈이에요. 줄리아드처럼 세계적인 음악학교를 세우고 싶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제가 할 일이죠.”

▶기부 천사로도 유명합니다.

“받을 때보다 줄 때가 행복합니다. 기부하면 노래도 잘되고 마음도 따뜻해지거든요. 40여년간 200억원 정도 기부했는데, 그래도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거노인이나 결식아동, 소년소녀 가장과 다문화가정 등 소외계층을 돕는다는 생각을 하면 저절로 힘이 납니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죠. 1974년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생애 첫 리사이틀을 가졌을 때 아버지의 권유로 경기도 시흥 나자로마을에 수익금을 기부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너부터라도 솔선수범해 연예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후배들이 일군 ‘K팝’ 열풍이 뜨겁습니다. 어떻게 봅니까.

“국력이 신장되고 국격이 높아지면서 K팝이 해외에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계와 선율을 보면 K팝은 서구적인 음악입니다. 물론 우리 것이냐, 남의 것이냐보다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중요하겠죠. 하지만 K팝에 우리 전통가요의 독특함을 집어넣어 음악을 새롭게 창조할 필요도 있습니다. 가령 한 소절에 ‘한 많은 내 청춘’ 등의 가락을 넣으면 외국인이 볼 때 신기할 것이며, 한국인으로서는 더 자랑스러울 테니까요.”


◆ '가요계 신기록 제조기' 하춘화
여섯 살 때 데뷔…앨범 134장 · 2500곡…'최다 공연' 기네스 기록

하춘화 씨는 가요계의 신기록 제조기다.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인 1961년 ‘효녀심청 되오리다’로 최연소 데뷔 음반을 출시했다. 열 살때인 1965년에는 최연소 레코드회사 전속 가수, 최연소로 영화주제가를 부른 주인공이 됐다. 1970년대 하루 리사이틀 공연에 1만1900명을 동원, 당시 유료관객 최다 기록도 세웠고 1985년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평양에서 공연했다. 1991년에는 개인 최다공연 8000회로 이 부문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발표곡은 2500여곡, 앨범은 134장에 이른다. ‘잘했군 잘했어’ ‘영암 아리랑’ ‘날버린 남자’ 등 수많은 히트곡을 노래했다. 봉사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1992년 이웃사랑을 실천한 공로로 대통령표창, 2001년 문화예술발전과 사회봉사에 앞장선 공로로 옥관문화훈장을 각각 받았다.

1982년 경남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그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공연예술학 석사를 거쳐 2006년 성균관대 철학과에서 예술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