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대, 영화,문학,합창,뮤지컬 등으로 자아실현
베이비붐 세대 은퇴하면 '실버문화' 주류 될 듯

스크린 속 그레이스 켈리는 45년 전 그때처럼 생생하고 우아한 20대의 젊음으로 남아있었다.

"이 영화를 본 게 언제였더라"

김동수(73)씨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극장에 와본 지도 10년이 넘었다.

극장 조명이 꺼지고 '모감보'(1955년.1965년 개봉)의 시작을 알리자 동수씨의 심장이 고동친다.

그레이스 켈리가 나오고 연인 클라크 게이블이 등장한다.

"저 사람들은 늙지도 않았네"

자신도 모르게 흰 머리칼에 손이 갔다.

그 시절 동수씨도 은막의 저 배우들처럼 홍안이었을 테다.

구부정한 70대 노인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시절. 시간은 야속하게도 그렇게 흘러버렸다.

"필름이 돌아가면 같이 본 친구랑 놀던 기억이 함께 되살아나서 생각이 젊어져. 몸은 늙었는데 말이야"
서울 종로 낙원상가에 있는 '실버영화관' 입구가 갑자기 북적거렸다.

1968년에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생 12명이 한꺼번에 극장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극장 앞에는 고교생들의 재잘거리는 듯한 수다가 피어올랐다.

동창회 회장 여은근(62)씨는 "고등학교 졸업한 지 43년 되는데 그때 빡빡머리를 하고 볼 때와 지금처럼 머리 희끗희끗할 때 보는 게 또 다른 감회가 있다"고 했다.

학생주임의 도끼눈을 피해 '땡땡이쳐가며' 본 영화였다.

무심코 "할아버지"라고 불렀더니 "누가 할아버지야"라는 꾸중이 돌아왔다.

조연 연기자로 활동하는 김윤식(72)씨는 이 극장에서만 모감보를 벌써 세 번 봤다.

그는 "경복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이 근처에 있던 우미관에서 친구들과 영화를 보곤 했다"며 "지금은 혼자 보지만 지금이나 예전이나 그레이스 켈리는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번 달 들어 실버영화관에선 '남과 여', '티파니에서 아침을', '고교얄개'를 상영했다.

300석 좌석은 종종 매진된다.

'세기의 요정' 오드리 헵번이 기타를 치며 주제곡 '문 리버(Moon river)'를 부른 고전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개봉 첫날 매진에 상영기간 한 주 내내 하루 500명이 넘는 올드팬이 찾았다.

이 영화관은 2009년 생길 당시 관객이 6만5천명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2배가 넘는 15만명을 예상하고 있다.

60대 이상 노년층 인구가 늘어나면서 문화생활을 즐기려는 '신(新)노년층'이 등장하고 있다.

전후 빈곤 속에서도 대중문화의 싹이 자라나던 6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자랐던 이전 노인세대와는 다르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했던 학창시절에 즐겼던 영화나 노래를 다시 찾아 젊은 시절을 반추하고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꿈에 뒤늦게나마 도전하는 것이다.

한 담배회사가 만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올해 8월 연 '신노년문학상'에는 시와 수필 551편이 응모됐다.

지난해보다 149편이나 늘어났다.

60∼70대 노인들로 구성된 실버합창단이나 실버뮤지컬단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인기 절정을 달리다 잊혔던 포크가수들이 지난해부터 '세시봉 열풍'을 타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도 한국사회에서 노년 문화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시봉 콘서트만 네 번 가봤다는 최성희(65)씨는 "송창식, 윤형주가 눈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데 나도 모르게 소녀처럼 소리를 질렀다"며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소정 부연구위원은 "젊은 세대는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노년층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집약체라는 의미로 문화를 즐기려는 욕구가 있다"며 "이전에 누렸던 글이나 영화와 같은 문화에 대한 선호가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노년층의 교육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젊은 시절 문화생활을 즐겨본 50대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노년층에 진입하기 시작하면 노년층의 문화는 당당한 주류로 전면에 등장할 전망이다.

신노년문학상을 심사한 박명진 중앙대 교수는 심사평에서 "작품 속의 어르신은 전통적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미지와 다른 새로운 모습의 '멋진 노신사 또는 노여사'였다"며 "작품에 숨어 있는 문학적 소질과 잠재한 지적 수준에 놀랐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이어 "글을 통해 제시하는 새로운 노인문화는 자아실현을 위해 매우 바쁘다는 것"이라며 "뒷방에 앉아있는 노인이 아니라는 자기표현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늙어간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한껏 뽐내려는 마음은 시심(詩心)으로도 절절하게 읽힌다.

'어느날 / 핑크빛 원피스에 하얀 핸드백을 들고 / 낮은 하이힐 화장도 옅게 / ...택시를 불러 타고 우아하게 앉아 가는거야'(신노년문학상 시 부문 대상작 '나 늙으면 이렇게 살고 싶어' 중)


(서울=연합뉴스) vivi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