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더빌트家의 도전정신이 '富의 지도' 다시 그렸다
180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1794~1877)가 부자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이내 해운과 항만사업으로 거부가 됐고 남북전쟁 후에는 철도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어마어마한 부를 일궜다. 포브스지는 경상달러 가치로 환산해 세계 부자 순위를 매기는데 역대 최고 부자(2008년 기준)는 존 록펠러(3183억달러)가 꼽혔다.

이 명단에 4위와 10위를 차지한 부자(父子)가 있었으니,코넬리우스 밴더빌트가 1674억달러로 10위,그 아들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가 2316억달러로 4위에 꼽혔다. 당시 빌 게이츠는 20위였다.

밴더빌트가도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한미한 농부 출신이었다. 코르넬리우스는 12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연락선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그는 16세 때부터 연락선을 사서 사업을 시작했다. 골드러시 때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증기선을 운영하며 거부가 됐다. 골드러시라는 역사적인 시기가 부의 축적에 행운을 가져다준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는 공적 영역으로서의 '폴리스'에 대비되는 사적 생활단위의 '집'을 의미한다. 아파트 시대를 살아가면서 소시민들은 누구나 한번쯤 자신만의 아늑한 오이코스를 꿈꾸지 않을까. 옛말에도 "사람은 평생 열심히 살면 세 채의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돈을 좀 벌었다 하면 먼저 집부터 마련하는 모양이다.

부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주립공원 '하이드 파크' 역시 밴더빌트가의 저택이었다. 밴더빌트가의 딸인 에밀리 밴더빌트가 1886년에 지은 엘름 코트는 국제연맹이 창설된 1919년 '엘름 코트 회담'이 열린 곳이다. 밴더빌트가 남긴 대저택은 26채로 대부분 국가에 헌납돼 관광지로 개방됐다.

밴더빌트가 남긴 유산 중에는 밴더빌트대도 있다. 테네시주 내슈빌에 있는 이 대학은 '남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명문사학이다. 1873년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가 100만달러를 들여 세웠다. 평등국가인 미국의 모든 계층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공헌할 수 있는 대학이 설립 취지였다.

요즘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앵커로 CNN의 앤더슨 쿠퍼가 꼽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바로 밴더빌트의 상속녀인 글로리아 밴더빌트다. 쿠퍼는 오프라 윈프리 쇼를 이어 '앤더슨' 쇼를 진행하고 있다. CNN에서 연 1000만달러를 받는다.

그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ABC방송 시험에 낙방한 뒤 스스로 기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가짜 기자증'을 만들어 비디오카메라만 지닌 채 미얀마의 전장으로 달려갔다. 미얀마 반군을 취재해 '채널원'이라는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팔았다. 이게 오늘날의 쿠퍼를 만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간절해야 하고 무모할 정도로 실행에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쿠퍼의 어머니 글로리아도 상속녀로서의 안온한 삶을 거부하고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청바지 디자이너로 높은 평판을 얻었다. '글로리아 밴더빌트 디자이너 진'을 설립해 직접 디자인한 진을 선보였고 캘빈 클라인과 청바지를 내놓기도 했다. 시인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사랑은 서서히 오는 것'이란 시는 우리나라에서도 애송되고 있다.

밴더빌트는 도전정신으로 새로운 부의 지도를 만들었다. 밴더빌트는 미국 전역을 관통하는 철길을 내며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글로리아와 쿠퍼 모자는 선조들이 물려준 어머어마한 재산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내며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