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푸틴의 꿈
푸틴 러시아 총리가 자라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단주거지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던 곳이다. 험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그는 어려서부터 격투기를 배웠다. 처음엔 권투를 시작했으나 코뼈가 부러지고 나서 유도로 바꿨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악바리 근성이 있던 푸틴에겐 설표(雪豹)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면 대결을 마다하지 않고 '공격받으면 지체없이 보복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한다.

2000년 대통령이 될 때 그가 내세운 구호도 강한 러시아였다. 당선 후에는 체첸 반군에 포탄를 퍼부었고,국제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하기도 했다. 2009년엔 3개월간 임금을 체불한 공장주에게 "당장 지급하라"고 호통을 치며 펜을 집어던졌다. 이 장면이 TV로 전국에 중계되면서 푸틴이 나서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올 8월엔 "미국이 엄청난 부채를 쌓아가면서 전 세계 금융을 위협하고 있다"며 "세계 경제에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푸틴이 이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배경엔 국력 신장과 국민들의 신임이 깔려 있다. 대통령 재임 8년간 GDP는 4배,외환보유액은 10배,수출은 3배나 증가했다. 주가는 12배나 치솟았다. 석유값이 급등한 덕을 많이 봤다고는 하지만 강한 추진력도 한몫했다. 지식인들이 등을 돌린 가운데서도 줄곧 70~8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재미있는 건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전략을 참고했다는 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 국제문제보좌관 시절 "박 대통령에 대한 책이 있으면 어떤 언어로 쓰여 있든 모두 구해달라"고 지인에게 부탁했단다.

내년 3월 대선 도전을 선언한 푸틴이 160여명의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11,12일 중국을 방문한 것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과 포괄적 협력관계를 다지면서 '유라시아경제연합'을 구축하려는 구상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동북아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기면서 우리도 그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푸틴은 강한 러시아를 위해 부국강병책을 폈던 차르(czar · 황제) 표트르 대제를 추종한다는 걸 내세우고 있다. 크렘린궁에 있는 집무실에는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까지 걸어 놓았다. 내년 대통령에 당선되면 12년 장기집권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1세기 차르'를 꿈꾸는 것일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