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재정ㆍ신용 위기 공포가 세계 금융시장의 대형 악재로 떠오르고 있다.

프랑스 등 유로존 핵심국에서 자금 경색과 신용 위험 조짐이 나타나 유럽계 자금 비중이 높은 국내 금융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타격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만반의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외국인 자금의 급격한 이탈 가능성에 대비해 통화 스와프 체결 등 광범위한 국제 공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발 신용경색 위기 고조

미국 경기의 침체와 유럽 남부 지역의 재정위기로 불거진 세계 금융시장 불안이 유럽 국가의 신용등급 하락과 신용경색을 부채질하고 있다.

유럽 금융위기의 핵으로 새롭게 부상한 나라는 프랑스다.

이 나라의 신용등급 강등 루머에 최근 미국과 유럽 증시가 폭락하기도 했다.

S&P 등 3대 신용평가사가 강등설을 부인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불안심리는 여전하다.

12일 발표된 프랑스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제로'였다.

1분기 0.9%보다 크게 후퇴한 수치다.

유로존 채무 위기가 결국 프랑스까지 전이될지 모른다는 불안의 근거가 일부 확인된 셈이다.

일부 아시아 은행이 유럽에서 자금을 회수한다는 소식도 있다.

2008년 위기 당시 최초로 리먼에 대한 익스포져(위험노출액)를 줄였던 싱가포르 은행들이 프랑스 은행과 구축한 크레딧 라인을 축소했다는 것이다.

신용시장의 건전성을 반영하는 주요 지표인 리보(런던 은행간 금리)-OIS(초단기 대출 금리)간 스프레드는 2009년 4월 이후 가장 확대됐다.

유럽 은행들이 자금거래를 주저한다는 신호다
삼성증권과 국제금융센터 등에 따르면 유럽 주요국들의 국가부도 위험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최근 급등했다.

11일 기준으로 프랑스는 170bp로 7월 말보다 48bp(1bp=0.01%p) 급등했다.

국제금융센터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이탈리아, 스페인의 국채 매입으로 해당국 국채 금리가 하락했으나 프랑스로 위기가 전염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은행 로버트 졸릭 총재는 최근 위기가 선진국조차 숨 돌릴 틈도 없는 '새롭고 더 위험한' 국면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호주의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유로존의 국가부채 악재가 미국 신용등급 강등에서 나타나는 '중장기적인' 문제보다 더 걱정스럽다고 지적했다.

2008년 신용경색과 비교하면 개인 빚이 적고 '급작스런 충격' 요인이 없지만, 금리 인하나 재정 투입 등 조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 유럽발 한국 충격 불가피

유럽 위험이 해당 지역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언제든지 직격탄을 날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금융기관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국내 증권사와 금융연구기관 등에 따르면 프랑스의 대(對) 한국 신용위험노출액은 227억유로(원화 35조)다.

프랑스 자금이 한국에서 이탈하면 충격이 클 수밖에 없는 규모다.

유럽의 다른 나라는 영국 695억 유로, 프랑스 227억 유로, 독일 132억 유로, 이탈리아 12억 유로 등이다.

유럽 위기는 이미 국내에 반영되는 듯한 조짐이 있다.

한국 위험지표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지난 12일 한국 CDS 프리미엄이 140bp(1bp=0.01%)로 전날의 136bp보다 4bp 상승했다.

작년 6월11일 이후 최고치다.

이 지표는 올들어 1일 101bp, 9일 125bp, 10일 134bp 등에 이어 최근에는 더욱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당국은 단기외채가 많이 줄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보인다.

그러나 LG경제연구원은 "한국의 단기외채비율은 지난 3월 말 38.4%로 2008년 6월 말 48.2%보다 낮아졌지만, 주요 신흥국보다는 여전히 높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신흥국 중 칠레와 터키를 제외하고는 아르헨티나, 남아공화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멕시코, 태국, 브라질, 인도, 페루, 중국, 필리핀, 러시아 등 대부분 나라의 단기외채비율이 한국보다 낮다고 설명했다.

외화유동성이 한국에서 급격하게 이탈하면 한국 금융위기가 본격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경제는 외화유출→외환시장 충격→환율상승→원화 부족→신용 경색→주가지수 하락→실물경기 타격 등의 경로를 밟을 수도 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교수는 "사태가 악화해 유럽계 은행 문제가 심각해져 미국으로 번지면 3년 전 서브프라임모기지에 준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통화스와프 등 대비책 절실

금융당국은 외화유동성 확보를 은행권에 독려하고 있다.

재무건전성과 외화유동성의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금융연구원 박성욱 연구원은 "정부가 위기상황을 가정해 빌리는 돈의 원천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 빠져나갈지 점검해야 한다.외화보유액을 현명하게 쓰면서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은행세 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은행들의 단기 외화차입 자금이 많이 빠져나가면 환율이 폭등한다.위기를 대비해 안전장치로 은행세를 미리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막상 위기가 터졌을 때는 비상수단이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외환시장의 극심한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국과 체결한 통화 스와프(Swap) 협정이 시장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와프는 현재의 계약 환율에 따라 자국 화폐를 상대국 통화와 교환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고서 계약 환율로 원금을 재교환하는 거래를 말한다.

외환위기가 생겼을 때 원화를 맡기고 달러를 빌리는 방법이다.

한국은행은 2008년 10월30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협상해 최대 300억달러 이내에서 미국 달러화를 공급받기로 했다.

리먼사태로 요동쳤던 외환시장은 이후 급속도로 안정됐다.

같은 해 12월12일에는 한국은행이 중국 인민은행과 260억 달러 상당의 원-위안화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일본과는 통화 스와프 규모를 기존 13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확대했다.

LG경제연구원의 신민영 거시경제실장은 "외국인 주식투자 비중이 30%를 넘는 상황에서 한꺼번에 돈이 빠져나가면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한다.과거 사례를 교훈 삼아 통화 스와프를 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와프 체결 시도가 한국 위험성을 대외에 알리는 부정적인 신호로 해석될 수 있는 점은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정광호 한신정평가 연구위원은 "리먼사태 당시와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와 함께 동시에 스와프협정을 체결하면 부작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