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받았을 때 작게 인쇄돼 있는 전화번호가 흐릿하게 보인 지 벌써 몇 년이 됐다. 시력이 워낙 좋지 않아 학생 시절부터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안경을 쓰고도 바로 앞에 있는 명함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것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처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계속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곧 이것이 바로 '노안'이라는 현상임을 알게 됐다. 대신에 멀리 있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잘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즈음에 한 여자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었다. 여학생이 200명 넘게 모여 있는 강의실에서 출석을 불러야 하는데 지난주까지 잘 보이던 출석부 글씨가 흐릿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안경을 내려 쓰고서 출석을 불러야 했는데,그 이후로 강의를 나가는 날마다 출석을 부를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노안이 싫어도 이미 시작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기에 가까운 것을 보기 위해 돋보기안경을 따로 쓰기 시작했다. 돋보기 초보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돋보기를 쓸 때마다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기운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안과 권유로 '다초점 안경'을 착용하게 됐고,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다초점 안경을 처음 쓸 때는 사용법을 잘 몰라서 안과를 원망하기도 했다. 돋보기를 쓸 때처럼 중앙에 초점을 맞추었더니 효과는커녕 어지러웠다. 다시 돋보기를 쓸까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가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눈동자만 움직여야지 안경이나 고개를 움직이면 초점이 맞지 않아 어지럽다는 것이었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간단한 것이었지만,필자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가까운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눈의 수정체 탄력도가 떨어지는 것처럼,살다 보니 우리 주변의 작은 일상들이나 작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잘 집중하지도 않고 무시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다. 신호가 아직 바뀌지도 않았는데 차를 몰고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관행이라는 이유로 불법을 묵인하기도 한다. 또한 바쁘다는 핑계로 가까운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고,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여름휴가를 생략하기도 한다. 멀리 보이는 인생의 성공을 위해 가까이 있는 것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달리는 것이 노안이 오는 시기인 40~50대 남성들인 것 같다.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작은 일상이 모여서 우리의 인생을 이룬다. 주변의 작은 것들을 무시하다가는 인생의 목표에 다가가기도 전에 무엇엔가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목표에 도달한다고 해도 같이 기뻐해 줄 누군가가 옆에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그동안 지나친 작은 것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고승덕 국회의원 audfbs@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