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시달렸다. 내 일만 하겠다. "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사진)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악몽 같은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기쁨보다는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커보였다.

변 전 국장은 14일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사건'에 대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직후 "앞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보고펀드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보고펀드 일에 더 집중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다"고 털어놨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만 언급됐으면 좋겠다"며 말을 아꼈다.

◆상처뿐인 무죄

이날 판결로 변 전 국장은 보고펀드 운영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4년이 넘는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명예를 되찾게 돼 한결 홀가분해졌다.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나와 행시 19회로 관직에 입문한 그는 잘나가던 '엘리트 공무원'이었다. 재무부 기획관리실 사무관을 시작으로 국제금융과장 국제금융담당관 경제정책국장 금융정책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외환위기 당시 외채만기 연장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금융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15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변 전 국장은 금융정보분석원장(1급)으로 일하던 2005년 1월 "외국자본에 대항하겠다"며 사표를 내고 사모펀드인 보고펀드를 설립했다. 하지만 2006년 시작된 검찰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수사로 '국부를 유출한 인물'로 낙인 찍혀 구속됐다. 그 사이 관료사회에는 '변양호 신드롬'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나중에 문제가 될 일은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신주의를 뜻하는 말이다. 변 전 국장은 자신을 고발했던 시민단체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낼 것이냐는 질문에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겠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정책적 판단이다"

대법원은 이날 1,2심의 판단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다. 재판부는 "외환은행이 처한 경제적 상황 등의 사정을 살펴 엄격하게 배임죄 성립 여부를 따져야 한다"며 "매각 협상 위임을 받은 공무원이 경제적 상황과 매각의 필요성 등을 고려 · 판단했다면 결과적으로 손해가 발생했다 해도 배임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1 · 2심 재판부는 "외환은행이 비관적인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전망치를 제시한 것도 가격을 고의로 낮추려는 목적이 아니라 신규 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협상 결렬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판결했다. 또 "론스타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경영적 · 정책적 판단에 따라 실시한 은행 매각에 대해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며 배임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로 변 전 국장과 은행 관계자들은 헐값 매각 논란에서 자유롭게 됐다. 이들은 상처뿐인 무죄만 남았다는 자조 섞인 반응을 보였다는 전언이다. 은행은 남고 관련 인사들은 낙마한 상태다.

외환은행은 매각 이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외환은행의 자산규모는 현재 116조20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불어났다. 지난 상반기에만 5291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특히 외환은행은 지난해 말 8917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려 가장 큰 흑자를 낸 은행 중 하나가 됐다.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되팔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이고운/이태훈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