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귀양살이 시름, 茶 한 잔으로 달래도…그리운 벗 생각하니 아! 애달퍼라
풍찬노숙의 10년 세월을 견뎠던 다산초당

옛 강진읍성 동문 밖으로 사의재를 찾아간다. 주막과 다산의 방을 재현한 집 두 채가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에서 지내는 4년 동안 다산은 백련사 혜장 스님과 교우를 트고,아들 학연을 불러와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2007년에 '복원'한 사의재는 다산의 불우한 처지를 떠올리기엔 너무 과한 듯하다.

도암면 귤동마을 다산초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다산이 보은산방과 이학래의 집을 거쳐 다산초당으로 옮겨간 것은 무진년(1808년) 봄이었다. 이곳에서 1818년 9월 해배될 때까지 10년을 보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는 마침 '다산과 황상의 만남' 전이 열리고 있었다. 12세의 황상이 38세의 정약용을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해 맺은 사제의 인연은 '정황계안'이라는 약정을 통해 이들의 사후 정씨(丁氏)와 황씨(黃氏)가의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신의로 꽃핀다.
[감성 여행] 귀양살이 시름, 茶 한 잔으로 달래도…그리운 벗 생각하니 아! 애달퍼라
다산이 제자 황상에게 보낸 간찰인 '견서여시'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두충나무숲 사잇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간다. 숲길을 지나 귤동마을 고샅길을 올라가자 산길이 나온다. 사람들의 잦은 발길에 뿌리를 덮은 흙이 파인 것일 게다. 소나무 뿌리가 온통 드러난 길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했지만 난 '백성의 길'이라 부르고 싶다. 다산의 시 '애절양'이나 '기민시'에 나오는 민초들처럼 삶이 뿌리째 뽑히거나 드러난 사람들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1958년에 새로 지은 단층 기와집인 다산초당이 얼굴을 내민다. 다산의 처소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거처인 서암도 그 이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초당 뒤편,돌 틈에서 솟아나는 약천에서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시고 나서 다산이 암벽에 손수 쓰고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들여다본다. 이 외딴 산중에서 10년간의 풍찬노숙을 견뎌낸 자신이 대견했던가?

이곳에서 다산은 본격적인 저술활동에 들어갔다. 물론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는 제자들과 함께 초당을 꾸미거나 솔가지 · 솔방울을 태운 화롯불에 차를 달여 마시기도 했을 것이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600여권의 책이 차례로 태어났다. 때로는 외로움이 삶의 동력이 되는 법이다. 문풍지가 바람에 음산하게 울어대는 겨울밤,호롱불 켜놓고 24개월 만에 죽은 딸 효순이,흑산도에 계실 둘째 형 약전 생각 등에 잠 못 이루는 다산의 모습을 그려본다.

'새들이 귀양가는 하늘가/ 눈길을 헤쳐 하늘이 끊어진 곳/ 별들도 휩쓸려 가버린/ 새소리조차 끊어진 곳/ 문득 홀로 남아/ 겨울밤 문풍지 울음소리를 듣는 사내/ 북풍은 왜 속절없이 휘몰아치고/ 문풍지는 왜 밤마다 흐느끼는지/ 찬 이슬 매맞으며 함께 우는 사내'(정호승 시 '다산' 부분)

요세 스님의 백련결사 도량 백련사

오솔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간다. 동암을 지나자 천일각이 나타난다.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을 그리며 강진만을 굽어보던 자리에 지은 정자다. 저 멀리 강진만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다산의 막막한 그리움이 저 바다를 끝없이 노저어 갔으리라.백련사로 넘어가는 길섶엔 대나무와 야생차가 자라고 있다. 이 길은 백련사 승려 혜장과 다산이 오가며 유 · 불의 경계를 넘어 우정을 나눴던 길이기도 하다. 다산이 아암 혜장(1772~1811)을 위해 쓴 '아암장공탑' 비문에는 둘의 만남이 기록돼 있다.

1805년 다산은 시골노인을 따라가 신분을 속인 채 백련사 주지 혜장을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10년이라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학문과 우정을 나눈다. 4년 뒤 다산이 만덕산으로 옮겨 오면서 둘의 만남은 더욱 빈번해졌다. 그러나 해남 대둔사로 돌아간 혜장은 1811년 가을,돌연 입적하고 만다. 세랍 40세.술을 탐닉한 것이 젊은 중의 명을 재촉한 것이다.

내리막길로 내려서자 산자락을 울창하게 메운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1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백꽃 피는 춘삼월에 이곳에 왔더라면 얼마나 황홀했을까. 동백숲과 동행해 걷다가 어둑어둑한 동백나무숲으로 들어간다. 동백나무들이 슬하에 4기의 부도를 감추고 있다. 탑신에 연꽃무늬를 둔 구슬 띠를 새긴 부도가 특히 이채롭다. 백련사를 중창한 원묘국사 요세 스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다. 원묘국사 요세(1163~1245)는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천태종 승려였다.

《동문선》에 수록된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에 따르면 불교의 타락을 목격한 그는 간화선과 화엄사상을 지향하는 보조 지눌의 정혜결사에 동참했지만 서로 길이 다름을 알고 천태사상을 바탕으로 한 불교개혁 운동인 백련결사 운동에 진력했다.

백련사 입구 2층 누각 만경루에 올라 멀리 강진만을 바라본다. 바다는 바라보는 자에게 '맞춤형' 위안을 주는 보살이다. 누각 안에는 공사 중인 응진당에서 '유배'된 나한들이 제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1층으로 내려오니 '만경다설'이라는 찻집이 있다. 가지고 다니면서 마시기 편리해서였는지 다산은 반야병다(떡차)를 좋아했다고 한다. 동백나무들이 걸어나오는 나를 백련사 입구까지 배웅한다.

멀리 벗어나 새삼스럽게 만덕산(408m)을 바라본다. 산꼭대기에 우뚝 솟은 암봉들이 제법 험준하다. 다산도 저 우뚝 솟은 암봉처럼 굳건한 사내였다. 나는 오늘 그릇된 세상을 개혁하고 싶어 마음이 뜨거웠던 한 조선 사내의 흔적을 더듬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74년,그가 그리던 세상은 오롯이 구현되었는가? 그저 흘러가느라 바쁜 강진만은 대꾸가 없다.

안병기 < 여행작가 >

21일까지 마량항 축제…가을 전어 맛보러 오세요

맛집

강진에는 서성리 명동식당 등 한정식으로 이름난 집들이 많지만 밥값이 만만치 않다. 강진읍 남성리 공용버스터미널 옆 골목에 자리잡은 화경식당(061-434-5323)은 조기구이,돼지불고기,생굴,된장찌개 등 한정식 못지 않은 상차림을 자랑한다. 백반 7000원.

여행 팁

마량항은 조선 초기 태종조 1417년 마두진 설치 이후 만호절제도위가 관장했고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거북선 1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마량포구에는 유서 깊은 만호성터가 남아 있고 까막섬이 부표처럼 떠있으며 바로 그 앞에는 고금도와 약산도가 있어 아름다운 항구로 손꼽힌다. 마량항 일원에서는 19~21일 제3회 마량미항축제가 열린다. 아름다운 항구에서 가을의 진미 전어맛을 즐길 수 있으며 '활어맨손잡기' 등 축제를 즐길 수 있다. 마량면사무소 (061)430-5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