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대영박물관은 세기적 사실을 발표했다. 1908년 영국 서섹스 필트다운에서 발견된 두개골 파편이 500만년 전 것인데다 원숭이와 현대인의 연결고리인 만큼 영국이 인류문명의 첫 발상지란 내용이었다. 그러나 49년 불소시험 결과 뼛조각은 600년 전 인간의 것으로 밝혀졌다.

박물관 측은 결국 53년 11월 "필트다운인은 속임수였다"는 뼈아픈 사실을 인정했다. 조금만 잘 살폈으면 알아챘을 사기극에 넘어간 데 대해 학계에선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흔적을 지닌 프랑스보다 더 빠른 시대의 현생인류 선조를 갖고 싶었던 영국의 욕심 탓으로 본다.

2000년 11월 5일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기극이 터졌다. 도후쿠 구석기문화연구소 조사단(단장 후지무라 신이치)이 며칠 전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지에서 발견했다던 '70만년 전과 60만년 전 석기 등 31점'이 실은 후지무라가 몰래 파묻은 가짜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후 조사 결과 후지무라의 발굴은 모두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역시 일본에선 개인의 공명심 때문으로 돌렸으나 들여다 보면 일본에 이집트 문명같은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집단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 왜곡은 이처럼 기대에 사실을 꿰맞추려는 시도에 의해 이뤄진다. 일본이 끊임없이 제기해온'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마침내 폐기되게 됐다고 한다. 한 ·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 제2기 연구에 참가했던 양국 학자들이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는 데 합의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김해 일대를 다스렸다는 주장이다. 일본이 내세운 근거는 진구(神功) 왕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정복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통치하다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백제가 칠지도와 칠자경을 헌상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

그러나 칠지도(七枝刀)는 일본에서도 오랫동안 '육차모(여섯갈래 창)'로 전해졌고 금은 상감기법이 사용된 칼은 일본 측 주장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됐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면 상대국에 대한 끈질긴 문제 제기,정확한 사료와 물증을 바탕으로 한 움직일 수 없는 근거 제시,양식있는 상대 학자들에 대한 꾸준한 설득이 병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국력을 키우는 것이고.역사는 언제든 힘있는 자 중심으로 쓰여지는 까닭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