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기에는 아주 젬병이다. 그러나 보는 것은 즐겨 한다. 외국 여행 중에 미술관,박물관에서 만나는 몇 세기 전의 풍경화,풍속화,인물화에는 그들의 시대가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에 매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몇 세기가 지났지만 어떻게 그 당시 삶의 모습이 지금과 그렇게 흡사한지,옛 그림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다가온다.

노래방에서 멋지게 한번 불러 보고 싶은 노래가 있다. 양인자 작사,김희갑 작곡,조용필 노래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노래 가사가 참 좋다. 고독한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이 서려 있다. 가사 중에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란 대목이 특히 끌린다. 21세기 한국의 대중가요에 느닷없이 등장한 빈센트 반 고흐.그러고 보니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은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고흐는 통하는 점이 있다.

2년여 전 서울중앙법원장으로 있을 때,격무에 시달리는 판사들의 머리도 식혀줄 겸 그들과 함께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모아 놓은 '오르세 미술관전'을 보러 갔다. 고흐는 자기와의 격렬한 싸움을 정열적인 화풍으로 승화했다고 한다. 어찌 자신이 산 흔적을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는지….내 집이나 사무실 한 쪽 벽에도 몇 점 고흐 그림의 복사본이 걸려 있다.

나의 고흐 사랑은 좀 오래되고 애틋하다. 지금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인상파의 걸작은 1984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에는 쥐드 폼(Jeu de Paume) 미술관에서 볼 수 있었고,재작년에는 고흐를 만나러 프로방스에 갔다. 고흐가 살던 아를르 역전은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했다. 까마귀가 울고,가지가 늘어진 늙은 버드나무 길이 시내 쪽으로 쭉 뻗어 있었다.

고흐가 그린 매춘부,세탁부,직조공,광부,농부들.다들 정직하게 일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들의 삶은 힘들다. 그림을 보면서 놀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내면까지를 잘 감싸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거친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까지 잘 전달되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 대한 고흐의 동정과 연민이 진지하고,그것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어서가 아닐까.

"거지든 매춘부든 사람의 눈은 그 아무리 장엄하고 인상적인 성당도 가질 수 없는 매력을 담고 있다"는 고흐."다른 사람들 눈에는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으로 비쳐질지라도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고흐의 야망은 자신의 운명을 건 사나이의 그것치고는 너무나 순수하다.

절망적인 분위기를 그렸던 고흐는 기실 삶의 빛과 희망을 전하려는 전도사다. 오늘도 나는 간다. 비록 정상에 다다르지 못하고 그대로 산이 된다 할지라도 저 눈 덮인 킬리만자로로.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이방인 고흐.고흐가 찾고자 했던,천국에 이르는 순례의 길 떠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 여정이 아닐는지.

이주흥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juhlee@hwaw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