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아래 산촌을 떠나 도시에 와 살기 시작한 지 3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오래 시간이 지나다 보니 달력으로만 시간이 가는 줄 알지 들판 위로 지나가는 시간을 종종 잊을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봄이 오면 바로 텃밭에 나가 냉이를 캐고,달래를 캐고,또 이런저런 꽃나무에 물이 오르고,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늘 지켜보며 자랐다. 그때는 달력으로 시간이 가는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집안 안팎의 나무와 풀들로 계절이 오가는 것을 알았다.

얼마 전 한 선배 소설가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나이가 50 중반인데도 아직도 달래와 냉이의 이름이 헷갈린다고 했다. 나물의 생김새와 뿌리 부근의 구슬을 깨물었을 때 입 안 가득 도는 향기로만 보자면 달래는 '달래'라는 이름보다 오히려 '냉이'라는 이름과 더 어울리지 않느냐고 했다. 그 선배만이 아니라 뜻밖에 '달래'와 '냉이'의 이름을 서로 바꿔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착각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 달래와 냉이를 들에서 처음 본 것이 아니라 밥상 위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아마 어릴 때 들판에서 달래와 냉이를 보았다면,그리고 그것을 지금처럼 봄이 오는 밭둑에서 호미로 직접 캐 보았다면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 시골집에 가면 지금은 두릅나무 숲으로 변해버린 닥숲이 있다. 처음부터 그곳에 닥나무가 많아서 닥숲이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예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젊은 날 닥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 그곳으로 파 옮겨서 닥숲을 만들었다.

매년 늦가을이면 인근의 한지 공장에서 종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노새가 끄는 수레를 몰고 와서 닥나무를 베어갔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어느날 다시 종이꾼이 창호지 뭉치를 들고 우리집을 찾아왔다. 내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집에서 쓰는 창호지를 닥나무를 키워 자급자족했던 것이다. 문에 바르는 종이가 그만큼 귀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닥나무 숲이 두릅나무 숲으로 변해버렸다. 이번엔 아버지가 닥나무를 밑둥부터 잘라내고 예전에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 한 그루 두 그루 두릅나무를 옮겨 심었다. 그것이 뿌리를 뻗고 새 가지를 쳐 몇 년 사이 온 밭이 두릅나무 숲이 되었다. 할아버지 때는 종이가 돈처럼 귀했는데,지금은 종이보다 나물이 더 귀한 시절이 된 것이다.

가만히 둘러보면 시골집 텃밭에 씨를 뿌려 가꾸는 달래 역시 그렇다. 예전에 곡식이 귀하던 시절엔 달래가 감히 밭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고작 들어올 수 있는 경계가 밭둑까지였다. 냉이 역시 밭에서 나는 것이긴 하지만 일부러 키우지 않았다. 잡초처럼 그냥 저절로 나는 것을 캐 바구니에 담았다.

지금은 일부러 그것을 비닐하우스 속에서 키운다. 깊은 산에서 나는 참나물과 취나물 역시 몇 해 동안 어머니가 산에서 그것을 뿌리째 캐와 밭에 옮겨 심었다. 다른 곡식보다 그것이 더 귀한 시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골에 일삼아,또 벌이삼아 일부러 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다니는 사람은 있어도 책 속에 나오는 것처럼 양지쪽 밭가에 앉아 예쁘게 나물 캐는 봄처녀는 없다. 나물 캐는 봄처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녀 총각이 없다.

전에 어머니가 말했다. 집 가까이 일부러 두릅밭을 만들고,산에서 뿌리째 나물을 캐와 텃밭에 심는 게 그것이 곡식보다 귀해서만이 아니라 그렇게 가까이에서 일부러 가꾸지 않으면 정작 기운 없는 시골 노인들이야말로 산에 나물을 두고도 나물 구경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추억하는 고향 풍경은 봄처녀가 나물을 캐는 미나리밭 사이로 어미닭과 병아리 떼가 종종종 떼지어 다니며 봄나들이를 하는 모습이다.

이순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