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노무현 전 대통령 측을 수사하기 직전인 지난 3월20일.이인규 대검찰청 중수부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나온 "4월은 잔인한 달,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수사의지를 다졌다. 이 부장은 "이번 수사에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며 "(밖에서) 어떻게 흔들든지 간에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두 달 반가량이 흐른 지난 5일.검찰수사를 받은 노 전 대통령이 투신 서거하고 이에 대해 '검찰책임론'이 불거진 가운데 또다시 'T.S.엘리엇'이 등장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경력 변호사 출신 신임검사 임관식에서 "너무 멀리 가는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만이 자신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엘리엇의 경구를 인용,검찰 수사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

김 장관은 또 "때로는 벽에 부딪혀 좌절할 수 있지만 이를 헤쳐 나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12일 발표된 박연차 게이트 수사결과에 따르면 검찰은 '무소의 뿔처럼' 갔지만,'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한 듯하다. 이번 사건의 핵심으로 꼽혔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서거에 따라 '공소권없음'으로 종결됐고,현 정권의 '숨은 실세'로 알려진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구속영장 기각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노 전 대통령의 일부 측근들만 구속됐을 뿐 수사선상에 오른 상당수 정치인과 법조인,기업인들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또 수사결과 발표에서 피의사실 공표죄 논란과 관련,"노 전 대통령의 명예를 손상시켰다고 거론되는 몇몇 사례들은 검찰이 브리핑하거나 확인해준 내용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검찰 내부의 '빨대'(언론 취재 정보원) 존재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뭐가 나올지 모른다"던 수사는 결국 검찰수사의 정치적 편향성과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남겨둔 채 마무리됐다. 국민들은 이제 검찰이 공정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수사를 위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아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황무지'에 나온 또다른 구절인 "올해엔 꽃이 필까"라는 질문처럼 검찰수사가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개화할지 지켜볼 일이다.

임도원 사회부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