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있기에 이끌리는 고향

아득한 추억찾는 '아름다운 반복'


우리는 왜 고향으로 가는가,반복은 아름다운가. 매일 밥을 먹는 일,잠을 자는 일,출근하는 일.반복은 지겨운가. 매년 가족의 생일을 챙기는 일,명절마다 고향에 가는 일.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머뭇거린다. 진해에서 태어나 창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마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상경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친근하면 '마진창'이라고 얼버무리며 한바탕 웃지만,보학(譜學)에라도 관심을 두면 진해에서 태어났지만 스물일곱 살이 돼서야 그 작은 군항도시를 고향으로 받아들였노라 장황하게 답한다.



스물일곱 살,나는 대학원을 수료하고 해군사관학교 교관이 돼 진해로 내려갔다. 그리고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 뒤늦게 소설가가 되기 위해 원고지를 메워나갈 때면 완성하는 문장보다 찢어버리는 파지가 더 많았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밤거리를 걷다가 커피숍이나 영화관 혹은 '흑백다방' 같은 음악감상실에 홀로 들어갔고 또 홀로 나와서 밤바다를 쳐다보며 노래 부르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3년을 꼬박 보낸 후 나는 장편소설가로 등단했고 제대와 동시에 진해를 떠났다.

그후로 나는 바다에 관한 소설을 여럿 썼다. '불멸의 이순신''독도평전''파리의 조선 궁녀,리심'은 물론 이번 소설 '혜초'도 천축국 인도를 향해 뱃길로 나선 젊은 수도승의 모험을 담았다. 왜 이렇듯 해양문학에 매혹되었을까. 습작에 몰두한 곳이 진해였던 탓이다. 또한 나는 작은 마을에서 뒤늦게 자신의 열망을 깨닫고 큰 세상으로 나아가 그 열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에 관한 소설을 여럿 썼다. '허균,최후의 19일'을 지나 백탑파 시리즈에서,운명과 맞서 싸운 도저한 영혼들과 함께 피흘리며 눈물을 쏟았다. 왜 이렇듯 비극에 빠져들었을까. 습작에 몰두한 곳이 진해인 탓이다.

그래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세 살도 되기 전에 떠난 진해가 아니라 스물일곱 살부터 서른 살까지 보고 듣고 만지고 뒹군 진해라고 사족을 달며 답한다. 그 시절 진해에서 나는 날마다 절망했고 그 절망의 무게를 견디며 소설가로 탈바꿈했다.

해마다 명절이면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다. 나는 소설이 써지지 않을 때,소설이 나를 지치게 만들 때 진해를 품는다. 거기,나만의 로터리들이 돌고,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하며,365계단이 높다. 거기,홀로 문장 하나를 건지기 위해 밤을 꼬박 걷는 문학청년이 있다. 거기,소설가가 될 수만 있다면 전부를 잃어도 행복하겠다고 맹세하는 젊음이 있다. 그 풍광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왔는가. 그 맹목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고향엔 왜 가는가. 누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형제일 수도 있고 친척이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향엔 왜 가는가. 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고향 진해에는 외할아버지,외할머니,할아버지,아버지의 묘지가 있다. 스물일곱 살의 나를 기억하던 동료 교관들은 제대 후 전세계로 흩어졌고,내가 가르쳤던 생도들은 해군 장교가 돼 군함을 타고 서해와 동해바다를 지키느라 분주하다. 젊을 때는 반겨주는 누가 있기에 기뻤는데,나이를 먹을수록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내게 참으로 소중한 이들이 세월과 함께 사라져 고향 뒷산에 묻혔다. 그들의 묘지 앞에서 나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떠올리고 목소리를 흉내내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따라한다. 그리고 내 안에 들어와 있던 그들을 확인하며 놀라고 미안하고 아득해진다.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여행은 멋진 것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여행자만이 여행기를 남기는 법이다. 고향엔 왜 돌아가는가. 너무 멀리까지 가서 행여 돌아오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을 가리기 위함이다. 고향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에게조차 고향은 텅빈 중심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진 진해라고 답해야겠다. 내 나이 쉰이나 예순에 갑자기 소설가가 아니라 다른 업을 택하고 싶어지면,그 업을 위해 노력하는 밤들이 있을 테고 절망하며 걷는 거리 역시 가로등 밝히며 나타나겠지.그땐 그 도시가 내 고향이 되리라.내 나이 열 살 때,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고향이 어디시냐고 여쭸더니 "진해!"라고 하셨다.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또 "진해!"라고 하셨다. 당신께서도 진해에서 큰 절망과 희망을 길어 올리셨을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고픈 추석 저물 무렵,반복은 아름답다.

김탁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