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던 대학의 학장은 2주마다 온갖 학칙을 만들었지만 수위는 방문객 안내절차조차 무시했다.

교내정책 또한 걸핏하면 변했다.

다섯번째 예산 회의가 열렸을 때 나는 참다 못해 대들었다.

어차피 압력때문에 바뀔 거면 이런 회의가 무슨 소용이냐고.학장은 말 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다음 학기에 나는 쫓겨났다.

이후 나는 이상주의자이기를 포기하고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려 애썼다.

'임어당(林語堂)의 1930년대 중국 얘기다.

2007년 서울.누군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털어놨다.

"점심 겸 회의차 일식집에 갔어요.

방이 춥길래 종업원을 불렀더니 보일러를 켰다고 하더군요.

한참 지나도 그 상태여서 다시 얘기했더니 이상하다고만 하고 그냥 나갔어요.

혹시나 하고 플러그를 봤더니 고정만 시키면 될 듯해 카운터에서 테이프를 가져다 붙였더니 곧 따뜻해졌어요.

그런데 일행 중 아무도 잘했다고 하지 않더군요.

오히려 설친다는 식으로 느끼는 것같았어요."

그는 순간 '추워도 다같이 추웠을 테니 잠자코 있었어야 했나' 싶었다고 했다.

당시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이른바 사회지도층이었다며 그런 사소한 일에서도 문제를 해결 내지 개선하려는 사람을 칭찬하기는커녕 '튄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데 '자리'와 '이익'이 걸린 조직의 혁신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혁신'이 국가사회적 과제로 대두된지 오래다.

정부 부처와 국공립 기관은 물론 민간기업까지 혁신팀 내지 혁신추진팀을 신설하고 정교한 평가시스템을 도입했다.

국공립기관의 경우 계량지표와 비계량지표를 만들고 평가단을 구성,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점검한다.

민간기업 역시 온갖 지표를 통해 하루하루 업적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문제는 그런데도 특별히 달라지는 건 적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국공립기관의 경우 평가하고 평가받느라 투입되는 공력이 평가에 따른 혁신의 결과보다 훨씬 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평가받는 곳의 인원과 예산은 거의 변하지 않는데 평가하는 정부 부처의 정원만 계속 늘어나는 게 그렇고,이렇다할 혁신의 열매가 나오기는커녕 걸핏하면 구태가 드러나는 것도 그렇다.

개중엔 평가에 신경쓰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상대평가인 만큼 신경 안쓸래야 안쓸 수 없는데 인원은 빠듯하다 보니 일의 우선순위가 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혁신에 끝이 있을리 없지만 무조건 지난해보다 향상돼야 점수를 더 주는 식의 평가방식 때문에 한번에 끝낼 일을 나눠서 하거나 문제를 미리 개선한 곳이 손해를 보는,터무니없는 일도 벌어진다는 마당이다.

결국 평가가 혁신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평가받는 기술만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평가 결과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수도 흔하다.

혁신이 가능하려면 세세한 부문까지 점수를 매기기보다 차라리 실수를 인정하고 허용하는 게 필요하다.

시도했다 실수하는 쪽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실수하지 않는 쪽에 점수를 더 주는 한 혁신은 어렵다.

의도까지 평가하기 힘들다면 차라리 자율에 맡기는 게 낫다.

말로는 도전정신과 상상력을 발휘하라면서 실제론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지 않나에만 신경쓰는 한 혁신은 불가능하다.

'가만히 중간은 간다'는 풍토가 없어지지 않는한 혁신은 시늉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항목만 많다고 평가가 제대로 되는 것도,평가가 철저하다고 혁신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