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 피죤 회장(73)은 항상 양복 상의 왼쪽에 비둘기 문양이 새겨진 피죤 브로치를 달고 다닌다.

세탁이라고 해봐야 비누가 고작이었던 1970년대에 섬유 유연제란 생소한 '물건'을 팔았으며 다국적 기업의 공세 속에서도 알토란 같은 토종 기업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마흔다섯살의 나이에 피죤을 세운 지 벌써 30년이 다돼가지만 서울 장충동의 한 고기구이집에서 만난 이 회장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다'는 표현 그대로였다.

"지금도 매일 내일을 향해 뛰고 있다"는 그의 열정은 여느 젊은이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연거푸 소주잔을 비우는 체력까지 더해 그에게서 나이란 무의미한 듯 보였다.

그의 삶은 '도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순탄치 않았다.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했던 '사건'들을 겪으며 단련된 이 회장의 말 속엔 둘러앉은 주반(酒伴)들을 감화시키는 연륜이 묻어 났다.

#젊은이들 대중가요 즐겨들어

-올해 73세신데 아주 건강해 보입니다. 비결이 있으세요?

"갑갑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운동'이라는 것은 '몸을 움직여라'는 말과 같거든.항상 움직이고 활동하니까 이 정도나마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워낙 실내에서 움직이는 걸 싫어해 가급적이면 넓은 공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산도 높은 산을 가고,바다도 이왕이면 넓은 걸 좋아해요. 산 보고,하늘 보고,그게 다 운동이지 뭐.늙을수록 호기심이 건강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요즘도 젊은이들 부르는 대중가요 듣는 걸 꽤 즐기는 편인데 정신 건강에 좋거든요."

-골프 예찬론자라고 들었습니다.

"1주일에 두 번 정도 오전에 치고 회사에 나갑니다. 요즘 우리나라 기업하기가 별로 안 좋잖아.평소에 스트레스 받다가도 골프 칠 때만큼은 다 잊고 공을 맞추려고 한 곳에만 집중하니까 그게 좋더라구.변화의 묘기가 있다는 점도 매력이예요. 매번 칠 때마다 공 놓이는 위치가 다르고 거리도 다르게 나오잖아요."

#7남매 막둥이가 졸지에 독자(獨子)된 사연

-선친께서도 기업가셨죠?

"젊은 시절 얘기는 잘 안하는 편인데….옛날 얘기라고 듣기 싫어하고 해도 뭔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야.돌이켜보면 참 얘깃거리가 많았던 시절입니다. 제 본적이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니까 서울 토박이입니다. 할아버지는 정이품 당상관을 지낸 분이셨어요. 한일합방을 비관해 술로 날을 지새셨다고 해요. 이 때문에 재산도 몰수당했겠지요.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선 기업가의 길로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꽤 유복하셨겠어요.

"그럼요.아버지 사업은 번창일로에 있었습니다. 피죤에 비하면 10배 정도 큰 회사였을 겁니다.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1시간가량을 내려가면 원덕과 양동이란 마을이 나오는데 당시 이 일대 수백만평의 논밭이 우리 집 소유기도 했고요. 유모 손에 자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하지만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제 말기에 강제로 조선운수와 합병당한데다 해방 후엔 미 군정에 의해 적산으로 분류돼 재산을 몽땅 몰수당했거든요. 게다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형님과 누님들이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어요. 이때 어머님이 매일 음식을 해다 격리돼 있는 자식들 병원 찾아다니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 후로 10년 동안 팔을 못 쓰실 정도였으니까요. 한번 닥친 불행은 멈춰서지 않는 것인지 3남4녀 7남매 중 누님 한 분과 저만 남고 모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졸지에 막둥이가 독자이자 장남이 된 겁니다."

-전쟁 때도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전쟁이 터졌어요. 당시 서울고에 갓 진학한 상태였는데 죽을 고비도 여럿 넘겼습니다. 어느 날 학생 전원을 강당으로 소집하길래 가봤더니 팔에 완장 찬 사람들이 인민군 입대원서 쓰라고 윽박지르더군요. '죽었다' 싶었죠.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맨 앞에서 학생들 지휘하는 좌익 간부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더라고요. 이때다 싶어 '형님'하면서 화장실 좀 다녀오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선뜻 보내줬습니다. 당시 학교 뒤에 산이 있었어요. 그길로 도망쳐 아버지랑 집 마루바닥에 숨어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나와서 밥 먹고 그랬습니다. 그때 인민군에 끌려갔던 친구들은 대부분 죽었을 겁니다. 인민군을 피해 대구까지 피난갔습니다. 전쟁 중이라 어느 학교에서나 공부만 하면 졸업을 인정해줬어요. 그렇게 해서 대구 양정고등학교의 위탁생이 됐지요."

-선친께선 기업가가 되길 바라셨나요?

"법관이 되길 원하셨죠.아버님만 해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인식이 강하셨거든.그런데 어쩌겠어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으니 나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모 대학 법대를 쳤다가 떨어졌어요. 그때 난 무조건 합격이라고 생각했는데….내가 타고난 악필이에요. 편지나 메모를 내가 써 놓고도 며칠 지나서 보면 나도 몰라볼 정도지.지금도 자필을 쓸 때는 카드 사용하고 사인할 때밖에 없어요. 어쨌든 악필 때문에 기업가의 길로 들어선 셈이네."

#무역회사 다니며 세상에 눈뜨다

-첫 직장 생활을 무역회사에서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A.I.메리트 앤 컴퍼니'란 무역회사에 친척 '빽'으로 들어갔어요. 직원이 영어 통역사와 타이피스트,영어 편지쓰는 사람,무역업무 실무자에 나까지 5명이 전부인 회사였습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의 삼성물산이 직원 20명 정도였으니까 아주 작은 규모는 아니지.그때는 사무실에 양초조차 없었고 시체가 길거리에 누워 있을 정도로 참혹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때 신용장 개설하는 것에서부터 세일즈까지 기본을 다 배웠어요."

-화려한 출발은 아니었네요.

"첫 달 월급이 1만환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대졸 사원들이 3만환까지 받던 시절이니까 난 사환 다음 정도밖에 안됐던 셈이지요."

#모르면 외우고,될 때까지 밀어붙이고…

-샐러리맨 시절 인정받기 위해 어떻게 하셨나요?

"일단 동대문에 가서 고물 타자기를 구입해서 퇴근하고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1분에 300자 정도 치면 최고 실력자로 인정받았는데 금세 실력자가 됐지.다음엔 무역업을 배워야겠다 싶어 선배 사원에게 업무 관련 문서를 얻어서는 집에가서 무조건 외웠어요. 아예 무역영어를 20가지 유형으로 간추린 다음에 통째로 외워버린거지.이렇게 하다보니까 다른 직원들이 맡던 몫까지 내가 혼자서 다 해냈고,1년 뒤 우리 회사 직원이 사장과 나밖에 안 남더라고요. 월급도 5만환으로 다섯 배 올랐습니다."

-'영업맨'으로 잔뼈가 굵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 직장은 사장이 사업을 정리하는 바람에 몇 년 못다녔어요. 하릴없이 있다가 자형이 경영하던 동남합성이란 제조업체에 1967년 입사했습니다. 당시엔 대도시 중심의 무역노선을 따라 '브로커'라 부르던 중개인들이 유통망을 꽉 쥐고 있었어요. 물건을 팔려면 브로커들을 잡아야 했습니다. 통행금지만 풀리면 새벽같이 집앞에 찾아갔지요. 한 보름쯤 찾아가면 밥이나 먹자며 들어오라고 그래요. 이때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사장될 때까진 명함을 안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내 이야기가 곧 회사 이야기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하지 명함에 쓰인 직함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신용이 밑천이었죠.한번 약속한 것은 철저히 지켰더니 나중엔 브로커들이 무역 정보를 들으려고 나를 먼저 찾곤 했어요."

#마흔 다섯에 도전한 피죤 창업

-피죤을 세우신 게 꽤 늦은 나이였죠?

"1978년 12월에 회사 등기를 마치고 1979년 5월1일 피죤이란 회사를 냈으니까 마흔 다섯에 내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홍익대에 근무하던 한도룡 교수가 디자인한 '떫은 블루'빛의 '1세대 피죤'이 그해 7월8일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섬유 유연제가 당시엔 생소했을 텐데요.

"우리나라에선 존재조차 몰랐죠.테스트할 만한 시장이 아예 없던 터라 제품을 개발하면서 우리 연구원 아내분들이 '모니터 9단'이 됐지요. 남편들이 샘플을 갖고 퇴근해 집에 오면 여름철 망사 옷에서 겨울 모직 스웨터에 이르기까지 각종 빨랫감에 제품을 풀어가며 다음 날 남편들에게 생생한 현장보고서를 제출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엔 일단 제품의 품질을 인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고심 끝에 중·고교의 가사 교사와 이화여대,숙명여대 등 금남(禁男)의 구역에까지 찾아가 제품을 알렸죠.피죤이 처음 나오고 며칠 안돼서 소비자 한 분이 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걸로 머리를 감아도 되냐'고 묻더군요.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갈길이 참 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후부터 여자들이 세 명 이상 모이는 곳이면 모두 다 따라다녔을 정도로 영업에 매달렸습니다. 계 모임은 물론이고 성당,교회,반상회 등도 직원들이 샅샅이 훑었죠.이때 우리 와이프가 얼굴 좀 붉혔을 겁니다."

-요즘 말로 '블루오션'을 개척하신 거네요.

"그렇죠.동남합성 근무 당시 여러 종류의 계면활성제 제품을 접했어요. 공업용 유연제(소프너)라고 보면 되는데 '하이론 K'라 불리던 소프너를 섬유에 적용한 게 바로 피죤이죠.다국적 기업인 유니레버나 헨켈 등이 섬유 유연제를 상용화한 게 1970년대 초반이니까 당시 한국의 사정에 비춰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결정이었습니다."

#'빨래엔 피죤'…토종기업 성공기

-피죤이 먹히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죠?

"샘플로 50만개를 뿌렸어요. 지금 말로 하면 '체험 마케팅'을 시도한 셈이죠.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서부터 '겨울에 얼더라'는 불만도 간간이 들어왔습니다. 사내에 '3시간 애프터서비스 팀'을 만들고 소비자 불만을 즉시 해결토록 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오더군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정전기가 '일등공신'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섬유 소재 대부분이 나일론과 폴리에스터였는데 이게 정전기에 취약했거든요. '피죤을 쓰면 정전기가 사라진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순식간에 제품이 팔려 나가기 시작했어요."

-어려움도 많으셨겠어요.

"피죤이 나온 지 정확히 6개월 뒤에 다국적 기업인 유니레버가 국내 기업과 손잡고 '포미'라는 신제품을 내놓더군요. 피죤이 된다 싶으니까 무려 12개 업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섬유 유연제 시장에 진입했습니다. 풍부한 자금력을 갖고 있는 거대 기업 앞에서 주눅들만도 했는데 이상하게 오기가 생기더군요. 경쟁이 치열할수록 '우리가 최고'라는 점을 강조하고 프리미엄 제품을 계속 내놨죠.희한하게도 판매가 더 잘되더군요. 그렇게 해서 1996년 2억개 판매를 돌파했고,2003년 이마트가 선정한 생활용품 인기 품목 1위를 차지했습니다. 현재도 시장 점유율 50%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피죤은 1979년부터 차별없이 공채를 통해 직원을 뽑고 있습니다. 지금도 원칙은 지켜지고 있고요. 널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지역주의,파벌주의,학벌주의예요. 청탁이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계속해서 거절해 왔습니다. 제가 만든 사훈(社訓) 중에 항진(恒進)이란 게 있어요. 후배를 육성하는 것 없이는 영원히 발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게 제 희망입니다. 80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작은 회사가 30년 가까이 실력으로만 직원을 뽑은 것,다시 말해 사람에 대한 믿음과 투자가 성공의 밑거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래의 피죤은 어떤 모습입니까?

"1992년 중국 톈진에 현지법인을 설립했고,지금 한창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연간 50만t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 국내 생산량의 6~7배 정도는 될 겁니다. 중국 사람들도 한국의 1970년대처럼 이제 섬유 유연제를 사용할 시기인 만큼 승산이 있으리라 봅니다."

-30년가량 피죤을 이끄셨는데 감회가 새로우시죠?

"매일 매일 어제보다 더 잘 해야지 하고 습관처럼 생활해 왔습니다. 정말로 저녁이 되면 내일만 생각했어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실행하려고.그러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이만큼 커져 있더라고요."

#손자가 선물한 넥타이가 내 보물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죠?

"하루는 대구에서 같이 수학한 동기생 이원극씨가 자신의 고종사촌을 소개해 주겠다며 나를 불렀어요. 그 고종사촌이 바로 지금의 아내입니다. 만나고 10일 뒤에 약혼하고 정확히 100일 뒤인 1962년 12월22일에 결혼했습니다."

-자식 농사를 잘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아들은 미국에서 경제학과 교수로 있는데 들어올 생각을 안하네요. 딸은 서울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다 1996년부터 회사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딸 이주연 부사장은 지난 6일 대표이사로 승진,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라면.

"한 명뿐인 손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2주일 전에 방학했다고 한국에 왔어요. 넥타이를 선물로 주더라고.지금 내가 매고 있는 게 손자가 선물한 겁니다."

정리=박동휘/안상미 기자·사진=김병언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