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 시인 >

모란꽃 지고 난 뒤 어느덧 집 가까운 밤나무 숲에는 밤꽃이 한창이다.

한 떼의 밤나무들이 공중에 엎지른 밤꽃 향은 어찌나 강렬하게 후각을 자극하는지,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다.

밤꽃 필 무렵부터 때이른 더위가 찾아온다.

삼복(三伏)은 아직 멀었는데 연일 불볕 더위가 세상을 뜨겁게 달구니 푸른 잎들도 뜨거운 물에 데쳐낸 듯 기운을 잃고 늘어지고,먼 산에서 우는 뻐꾹새 울음소리도 기운 빠진 듯하다.

반면에 텃밭에 심은 토마토와 가지들은 대기에 넘치는 양기를 듬뿍 빨아들이며 기세가 씩씩하다.

몸통이 푸른 토마토는 여물며 점점 붉은 기미를 띠고,검은 가지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며 더 검어진다.

텃밭 둔덕의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초란만한 복숭아들도 제법 커졌다.

한낮 더위에 허덕이다가 지하수를 퍼올려 목물을 한 뒤 냉장고에서 수박을 깨서 한 조각 깨문다.

검은 씨앗을 붉은 과육 속에 촘촘하게 박고 있는 수박은 얼음처럼 차고 달다.

이가 시린 이것을 한 쪽 베어 먹으며 더위를 달래고 있노라면,간혹 바람이 처마에 매단 풍경을 챙캉챙캉 흔든다.

바람이 풍경을 희롱하는 소리를 벗삼아 당시(唐詩)를 읽으며 더위를 견딘다.

개들은 그늘에 앉아서도 혀를 길게 빼물고 허덕인다.

온몸에 털거죽을 뒤집어쓰고 불볕 더위를 견디는 집 개들을 보면 그마나 사람 처지는 견딜 만하지 않는가!

비 소식이 있더니,후두둑이며 빗발이 마른 땅을 적신다.

더위에 지쳐 늘어졌던 식물들이 환호작약하며 일어선다.

생기를 되찾은 오동나무 넓은 잎들은 빗줄기를 맞으며 우쭐우쭐 춤추고,이마를 맞댄 청산 숲도 푸르고 싱그러운 정기로 넘친다.

이제 긴 비라 한다.

막상 장마가 시작되면 시골에서는 수족 부리는 일을 쉬고 모처럼 한갓지게 빈둥거릴 수 있어 좋다.

빈둥거리는 일도 하루 이틀 지나면 심심해서 몸이 배배 꼬인다.

온통 세상이 빗속에 묻혔으니 딱히 나들이하기도 마땅치가 않다.

마을회관에는 할머니들이 두엇 모여 감자를 쪄서 천일염에 찍어 먹으며 텔레비전이나 본다.

그도 심심해지면 담요를 펼친 뒤 동전 몇 닢씩 꺼내놓고 종일 화투짝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할머니들이 화투짝 맞추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 집에 혼자 남아 먼 산이나 맥없이 보고 앉은 영감들은 끼니를 굶기 일쑤다.

아아,장마다!'쌀을 씻다가/뜨물에 떠 있는 쌀벌레를 골라낸다/쌀 속에 들어앉아/오로지 쌀 파먹는 일밖에 한 일이 없는 놈'(복효근,'쌀벌레').시를 읽다가 이크,나쁜 짓이라도 꾸미다가 들킨 듯 뜨끔해진다.

나는 책벌레가 되어 책 파는 일밖에 한 일이 없다.

경서(經書)와 전기(傳記)들도 두루 읽었으나 깨우침은커녕 아직도 혼돈 속에서 허덕이며 생존의 압력을 느낄 때마다 전전긍긍한다. 옛사람은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애고,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낸 뒤 비로소 한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모든 진경은 막다른 데 있다'(복효근)하니,그 진경에 닿으려면 아직 멀었구나.

책을 벗삼아 더욱 가려 읽고 깊이에 나아가도록 더욱 극진해야겠구나.

제 덕이 얕고 기운이 탁한 사람은 여름이면 공연히 움직임이 많아 땀과 기력의 소모를 더할 뿐이다.

장마 때는 고요히 앉아 옛시인의 시를 모은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며 제 삶을 돌아보기에 좋다.

간혹 널리 섭렵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꼬는 자가 있지만 그건 뭘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널리 고금에 두루 통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맑고 고상해져 청고한 인격을 갖추는 법이다.

비 갠 뒤의 청신한 기상과 솟구치는 파도의 기세로 세상의 변덕과 황폐함에 맞서야 한다.

땅을 뒤집는 뜨거움은 내 안의 뜨거움으로 견뎌내고,절망은 그것을 올라 타 채찍을 휘두르며 건너가야 한다.

땅속에서 칠년을 견딘 뒤 지상에 나와 보름 동안 울다가 숨을 끊는 유지매미도 있다.

이 짧은 생을 두고 덥다 춥다 시다 쓰다고 투덜대며 다 흘려보낸다면 얼마나 억울한 것인가!

파초 잎을 후두둑 때리며 지나가는 소낙비처럼 인생은 짧다.

제 인생을 귀히 여기는 사람은 하루가 아까운 줄 알고,하루가 아까운 줄 알면 짧은 시간들도 헛되이 보내는 일을 경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