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잊혀진 에밀레종 기술자 박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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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星 來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신라의 금속 기술자 박종일(朴從鎰)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 이름은 몰라도 '에밀레종'을 모를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바로 그 종을 만든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 가 박종일이다.
'에밀레종'으로 익숙한 이 범종은 '성덕대왕신종'이 정식 이름이고,원래 당시 경주 봉덕사에 있었기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현재 경주박물관 앞마당에서 볼 수 있는 국보 제29호다.
우리 역사상 살아남은 범종 가운데 제일 오래된 것은 상원사 종(725년,국보 제36호)이지만,크기로는 '에밀레'가 제일이고,또 아름답고도 출중한 소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종을 만든 기술자를 우리는 잊고 지낸다.
통일 신라 때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742∼765)이 아버지 성덕왕(702∼737)을 위해 구리 12만근을 모아 종을 만들려다 이룩하지 못하고,그의 아들인 혜공왕(765∼780) 7년(771)에 완성됐다.
무려 34년이 걸린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기술상의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이런 큰 종을 완성했는지,후세의 해석이 분분했던 모양이다.
벌건 쇳물에 갓난아이를 넣고서야 종이 완성됐고,그래서 종을 칠 때마다 어머니를 원망하는 울음처럼 '에밀레'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생겼을 테다.
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종을 만든 기술자가 박종일이다.
종의 높이는 3.33m,종구(鐘口)의 지름은 2.27m이며 무게는 약 19t,지금 남아있는 신라 종 가운데 가장 크다.
이 종에는 모두 104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이 명문(銘文) 끝에 종을 만든 16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앞에 나오는 12명은 글 지은이와 글씨를 쓴 사람,그리고 이 일을 주관한 인물들이고,마지막 4명이 종을 만든 기술자들이다.
박종일은 바로 이 4명 가운데 첫 이름인데,그는 '주종대박사 대나마(大奈麻) 박종일'이라 기록돼 있다.
그 다음 세 명은 '차박사 나마 박빈내(次博士 奈麻 朴賓奈)' '나마 박한미(奈麻 朴韓味)' '대사 박부부(大舍 朴負缶)' 등이다.
높은 순서로 기록된 '에밀레종'기술자 4명(박종일,박빈내,박한미,박부부)의 신상 정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박종일조차 언제 어디서 누구 아들로 태어나,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는 신라의 17등 관계(官階) 가운데 10위인 대나마였고,기껏해야 5두품의 그리 높지 않은 지위의 기술자였음을 알겠다.
신라는 성골과 진골의 왕족이 지배층을 구성하고,이들이 17관등 가운데 상위 5개를 차지하게 돼 있었다.
그 아래 6두품,5두품,4두품이 있었고,그 신분에 따라 관직에서의 승진이 제한됐다.
종을 만드는 최고 기술자라 하여 '주종 대박사'라 했지만,그의 관계는 5두품의 상한인 대나마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4명의 기술진은 모두 박씨라는 점이다.
기술자 4명이 모두 박씨인 것과 대조적으로,나머지 12명은 모두 김씨다.
또 이들 김씨 가운데에는 당대 최고 권력자가 둘이나 된다.
처음 이름을 올린 김옹은 오늘의 국무총리 격인 대각간으로 이 주종(鑄鐘) 사업에 참여했고,다음에 등장하는 김양상(?~783)은 그보다 좀 낮은 각간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김양상은 '에밀레종'을 만든지 3년 만에(774년) 상대등이 됐다가,780년 쿠데타로 선덕왕이 된 인물이다.
생각해 보면 대각간이나 임금보다 종을 만든 기술자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은 '에밀레종'을 만든 정치인보다는 그 기술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 옛 과학기술자들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옛 과학기술자들 이름이나마 기억해 주려는 노력을 할 때,오늘의 과학기술도 발전의 동력을 얻게 될 것이 아닐까? 인사유명(人死留名: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이라던데.우리 과학기술사에 남겨진 이름을 찾아내 그들을 칭송할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신라의 금속 기술자 박종일(朴從鎰)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 이름은 몰라도 '에밀레종'을 모를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바로 그 종을 만든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 가 박종일이다.
'에밀레종'으로 익숙한 이 범종은 '성덕대왕신종'이 정식 이름이고,원래 당시 경주 봉덕사에 있었기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현재 경주박물관 앞마당에서 볼 수 있는 국보 제29호다.
우리 역사상 살아남은 범종 가운데 제일 오래된 것은 상원사 종(725년,국보 제36호)이지만,크기로는 '에밀레'가 제일이고,또 아름답고도 출중한 소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종을 만든 기술자를 우리는 잊고 지낸다.
통일 신라 때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742∼765)이 아버지 성덕왕(702∼737)을 위해 구리 12만근을 모아 종을 만들려다 이룩하지 못하고,그의 아들인 혜공왕(765∼780) 7년(771)에 완성됐다.
무려 34년이 걸린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기술상의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이런 큰 종을 완성했는지,후세의 해석이 분분했던 모양이다.
벌건 쇳물에 갓난아이를 넣고서야 종이 완성됐고,그래서 종을 칠 때마다 어머니를 원망하는 울음처럼 '에밀레'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생겼을 테다.
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종을 만든 기술자가 박종일이다.
종의 높이는 3.33m,종구(鐘口)의 지름은 2.27m이며 무게는 약 19t,지금 남아있는 신라 종 가운데 가장 크다.
이 종에는 모두 104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이 명문(銘文) 끝에 종을 만든 16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앞에 나오는 12명은 글 지은이와 글씨를 쓴 사람,그리고 이 일을 주관한 인물들이고,마지막 4명이 종을 만든 기술자들이다.
박종일은 바로 이 4명 가운데 첫 이름인데,그는 '주종대박사 대나마(大奈麻) 박종일'이라 기록돼 있다.
그 다음 세 명은 '차박사 나마 박빈내(次博士 奈麻 朴賓奈)' '나마 박한미(奈麻 朴韓味)' '대사 박부부(大舍 朴負缶)' 등이다.
높은 순서로 기록된 '에밀레종'기술자 4명(박종일,박빈내,박한미,박부부)의 신상 정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박종일조차 언제 어디서 누구 아들로 태어나,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는 신라의 17등 관계(官階) 가운데 10위인 대나마였고,기껏해야 5두품의 그리 높지 않은 지위의 기술자였음을 알겠다.
신라는 성골과 진골의 왕족이 지배층을 구성하고,이들이 17관등 가운데 상위 5개를 차지하게 돼 있었다.
그 아래 6두품,5두품,4두품이 있었고,그 신분에 따라 관직에서의 승진이 제한됐다.
종을 만드는 최고 기술자라 하여 '주종 대박사'라 했지만,그의 관계는 5두품의 상한인 대나마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4명의 기술진은 모두 박씨라는 점이다.
기술자 4명이 모두 박씨인 것과 대조적으로,나머지 12명은 모두 김씨다.
또 이들 김씨 가운데에는 당대 최고 권력자가 둘이나 된다.
처음 이름을 올린 김옹은 오늘의 국무총리 격인 대각간으로 이 주종(鑄鐘) 사업에 참여했고,다음에 등장하는 김양상(?~783)은 그보다 좀 낮은 각간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김양상은 '에밀레종'을 만든지 3년 만에(774년) 상대등이 됐다가,780년 쿠데타로 선덕왕이 된 인물이다.
생각해 보면 대각간이나 임금보다 종을 만든 기술자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은 '에밀레종'을 만든 정치인보다는 그 기술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 옛 과학기술자들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옛 과학기술자들 이름이나마 기억해 주려는 노력을 할 때,오늘의 과학기술도 발전의 동력을 얻게 될 것이 아닐까? 인사유명(人死留名: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이라던데.우리 과학기술사에 남겨진 이름을 찾아내 그들을 칭송할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