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운 < 한국외대 교수·정치학 >

한국과 프랑스,그다지 공통점이 많지 않을 것 같은 두 나라가 대통령을 국민 직선으로 선출할 뿐 아니라 2002년에 이어 이번에도 같은 해에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 번의 투표를 통해 상대다수로 대통령을 뽑는 우리나라는 지지하는 유권자가 많은 후보가 당선되는 데 비해 유효표의 과반수를 득표해야 대통령이 되는 프랑스는 국민의 과반수가 '싫어하지 않는' 후보를 뽑는다.

프랑스는 대선(大選)과 총선이 비슷한 시기에 치러지는 2002년을 앞두고 헌법개정을 단행해 7년이던 대통령의 임기를 하원의원과 같은 5년으로 단축함으로써 대통령이 하원의 지지를 잃을 가능성을 거의 없애버렸다.

반면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요일 저녁 프랑스 국민은 우리보다 앞서 향후 5년간 국정을 이끌어 갈 그들의 대통령을 선출했다.

우파 정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후보 니콜라 사르코지가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줄곧 보여준 대세론을 확인하며 사회당 후보인 세골렌 루아얄을 누르고 승리했다.

결선투표에 오른 두 후보는 최초의 전후(戰後) 베이비붐 세대이며 그동안 총리 등을 거치지 않은 '작은 후보'였다.

더구나 루아얄 후보는 결선투표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었고 사르코지는 헝가리 이민2세였다.

그렇지만 2주 전의 1차투표에 이어 유권자들이 결선투표에서 보여준 높은 투표율(85%)은 이러한 잔재미보다는 모처럼 전형적인 좌우대결이 펼쳐졌을 뿐 아니라 강력한 이미지의 우파 후보에 맞서 연속적인 패배를 벗어나려는 좌파의 위기의식이 작동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비록 그 어느 때보다 인물 중심으로 치러진 대선이었지만 프랑스 국민이 선택한 것은 결국 이미지보다는 정책이었다.

동일한 정파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후임자이면서도 "과거의 생각,습관 그리고 행태와의 단절"을 주창하면서 "노동과 권위 그리고 재능"을 회복시키겠다는 사르코지의 외침은 단조로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전직 내무부장관이 2년 전 파리 근교의 폭동 이래 외쳐온 '톨레랑스 제로(무관용)' 정책은 그 '극단성'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이민정책과 동화정책에 염증을 드러내던 프랑스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더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라"고 외치는 전직 대중운동연합 당수의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많은 그의 어조와 행동에서 이미 역동성과 성공의 기대감을 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완화되지 않는 실업률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재활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하는 온정주의적 사회정책에 대한 반발은 사르코지의 정책이 사회적 균열과 대립을 조장할 것이라는 우려보다도 더 컸다.

또한 사르코지는 미국과의 우호관계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당선 직후 미국 정계로부터 보기 드문 어조의 축하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당선에는 프랑스 좌파세력이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현실과 사회주의 원칙 사이의 딜레마에 갇혀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도 상대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각에서는 주요 후보의 당내 경선,미디어화된 캠페인뿐 아니라 당선자의 정책에 있어서도 '프랑스적 예외성'의 약화를 거론하고 있다.

또한 사르코지는 재임하는 동안 자신의 '난폭성,호전성(好戰性),권력독점욕' 등을 비난하는 좌파세력과 그의 단호한 자유주의적 정책의 희생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시비를 받게 될 것이다.

미국과는 달리 그의 당선을 달가워하지 않을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프랑스의 외교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시험이다.

시대와 나라에 따라 국민의 선택은 다를 수 있다.

그래도 프랑스 국민의 높은 참여정신과 선명한 정책노선 간의 대결,그리고 대선을 향한 과정에서 너무 일찍부터 부산을 떨지 않았던 모습들이 부럽다.

대선 일정을 7개월여 남겨두고 여전히 포퓰리즘과 이미지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대선 주자들이 염두에 둬야 할 시사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