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막대한 에너지 자원을 지렛대 삼아 잃어버린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7년간 고유가를 바탕으로 연간 7%대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자신감을 회복한 러시아는 이제 국유화한 에너지 자산을 세계 패권 장악을 위한 무기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천연가스 수출국기구(천연가스 OPEC)' 결성 움직임이다. 세계 최대 천연가스 생산국인 러시아는 이를 통해 세계 에너지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으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푸틴의 이 같은 전략을 '에너지 파시즘'으로 부르며 경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거침없는 에너지 강국 전략은 서방국가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어 에너지를 매개로 한 새로운 냉전과 갈등이 불가피해 보인다.

◆러시아 중심 에너지 수급벨트 구축

에너지를 통해 세계무대에서 영향력을 높이려는 푸틴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올 들어 매달 해외를 방문,에너지 세일즈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에너지는 러시아로 통한다"는 말을 만들어내려는 심산 같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이탈리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 3개국 정상들과 만나 송유관 건설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 카스피해 유전에서 흑해 연안 불가리아 부르가스 항구,지중해 연안 그리스 알렉산드로폴리스 항구를 잇는 총연장 280km의 송유관이다. 이를 통해 발칸반도의 에너지시장도 장악하겠다는 게 푸틴의 복안이다.

푸틴은 지난 2월에는 가스 OPEC 창설을 타진하기 위해 카타르 등 중동을 찾았다. 카타르는 러시아(26.6%) 이란(14.9%)에 이어 세계 3위(14.3%) 천연가스 생산국.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카타르였지만 일단 "천연가스 생산국가들이 가격 안정을 위해 공급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제안은 좋은 계획"이라고 맞장구쳤다. 2015년께가 되면 유럽의 천연가스 부족 사태가 현실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어 특히 유럽국가들은 푸틴의 가스 OPEC 결성 시도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는 앞서 지난 1월에는 인도를 방문,'이란-파키스탄-인도 가스관 프로젝트' 추진 방안을 협의했다. 이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이란은 미국이 틀어막고 있는 천연가스 판매의 활로를 동쪽 인도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생산국인 이란과의 경쟁에서 자유로워져 유럽 가스시장을 사실상 독점할 수 있다.

인도도 천연가스 공급이 원활해져 에너지 문제에서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된다. 러시아와 이란,인도의 에너지 삼각동맹이 노리는 바다.


◆러시아발(發) 에너지 갈등 증폭

세계의 에너지 수요국들은 푸틴의 이 같은 에너지 강국 전략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년 우크라이나,지난 1월 벨로루시에 취한 가스공급 중단 위협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우크라이나에 작년 1월 가격 협상 불발을 빌미삼아 가스공급을 전격 중단했었다. 지난 1월에는 러시아가 벨로루시에 수출하던 천연가스 가격을 2배 인상하자 벨로루시가 이에 반발해 '원유 통과세'를 안 내면 유럽으로 가는 송유관을 차단하겠다고 응수했다. 결국 독일과 폴란드로 수출하던 원유 공급이 끊기는 중대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러시아의 조치들은 세계 각지에 에너지 수급 불안을 심화시키고 분쟁 가능성도 높일 것으로 보인다.

거꾸로 러시아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에너지 투자는 가로막히고 있다. 작년 12월 러시아 사할린에서 원유 및 천연가스 개발 사업을 진행 중이던 로열더치셸 컨소시엄은 러시아 정부의 압력에 굴복,'사할린-2' 프로젝트 지분의 절반을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에 넘겨주고 말았다. 가즈프롬은 이 광구 지분의 절반 이상을 확보,사할린 개발의 통제권을 갖게 됐다.

마이클 클레어 미국 햄프셔대 교수는 이런 러시아의 전략을 '에너지 파시즘'이란 용어로 설명해 눈길을 끌고 있다. 서방국가 눈에는 에너지 확보와 수송,할당을 둘러싼 러시아의 공격적인 행보가 거의 파시즘적 행태를 띠며 세계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완성되는 푸틴의 시나리오

러시아의 에너지 강국 전략은 7년간에 걸친 푸틴의 집념이 응축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생산 세계 1위,석유 생산 세계 2위의 에너지 강국으로 유럽 천연가스 사용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등에서 유럽으로 공급되는 에너지도 러시아 송유관을 거쳐야 한다.

푸틴은 2000년 1월 집권할 때부터 러시아의 패권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를 위해 거대 국유 에너지 기업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됐던 가스산업을 다시 국유화하고 민간 소유 에너지 기업들도 모두 정부가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당시 러시아의 석유산업은 신흥 과두재벌을 뜻하는 올리가키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이자 올리가키를 대표했던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푸틴은 2003년 그를 사기와 세금 포탈 혐의로 잡아넣었다. 이어 러시아 석유생산의 11%를 차지하고 있던 유코스 계열 유간스크네프트가즈를 세금 체납을 이유로 경매에 부쳤다. 국영 석유기업인 로즈네프트가 이를 헐값에 인수하도록 했다. 결국 가스는 가즈프롬,석유는 로즈네프트,송유관은 트란스네프트라는 3대 국영기업 체제로 석유산업을 재편하는 그림이 완성됐다. 로열더치셸이 사할린 개발 지분을 가즈프롬에 넘기도록 한 것은 이런 푸틴 시나리오가 완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자신감이 뿌리

푸틴이 전 세계를 향해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경제가 고속질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6년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은 8300억달러로 1999년(1865억달러)의 4.5배로 급증했다. 외환보유액도 1999년 280억달러에서 2691억달러로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집권 당시인 2000년 1월 러시아의 증시 시가총액은 740억달러였으나 지금은 13.5배 뛰어 1조달러를 넘어섰다.

물론 이 같은 성적표는 유가 급등에서 비롯됐다. 국제유가는 2002년에서 2006년 사이 세 배나 뛰었다. 러시아 정부 재정은 현금으로 가득 찼고 러시아의 주요 채권국들로 이뤄진 파리클럽에도 부채를 다 갚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정도가 됐다. 푸틴의 지지도는 75%를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경제는 잘 굴러가고 인기는 높아지니 눈이 밖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안하무인 격인 세계 전략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거듭 밝히는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나온다. 푸틴은 지난 2월 뮌헨에서 열린 안보 콘퍼런스에서 "미국의 통제되지 않은 군비확장주의가 세계를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느끼게끔 만들었다"고 미국을 비난했다.

그는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러시아다"라며 "우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도 'NO'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