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니 5월에는 행사가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스승의 날을 앞두고 특별히 생각나는 분이 계시다.

바로 대학 때 지도교수였던 정의홍 교수님이시다.

한창 연구하실 50대 초반에 돌아가셔서 더욱 안타까워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은 고인이시지만,교수님은 좀 특별한 분이셨다.

대학생활에서 학생과 교수 사이가 무덤덤해질 수도 있지만,정 교수님은 학과의 모든 학생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셨다. 공교롭게도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우리 지도교수를 계속 맡으셨는데 학생들 중에 누가 여자 친구와 사귀고 헤어졌는지,누가 술을 많이 마시고 시험 시간에 늦었는지 등의 사소한 일까지 부처님 손바닥 보듯 훤하게 꿰고 계셨다.

또 연구실에 학생들을 불러 차도 직접 끓여주시고,좋은 책들을 많이 소개해주시면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잔소리 또한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교수님 별명이 '시어머니 교수님'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 모두에게 신경을 써주셨다.

객지 생활을 처음 하는 나를 위해 "안나는 제주도 출신이라서 활달하고 개구쟁이지만 많이 힘들고 외로울 거야.객지 생활하는 제주도 해녀 아가씨에게 너희들이 신경을 써주렴"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데 그 때 내 심정은 내가 촌뜨기라는 것을 놀리는 것만 같았고,더군다나 수업시간에 저런 말씀을 굳이 하셔야 할까 하고 잔소리 많은 교수님을 야속하게 생각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고향에서 공부를 하다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됐다.

어느날인가 '시어머니 교수님'께서 잡지를 보고 등단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하시면서 흥분된 목소리로 축하한다는 말씀을 열댓 번이나 하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난 그 때도 당황스럽고 쑥스러워서 제대로 감사의 마음도 전하지 못하고 통화를 끝냈다. 교수님은 그 때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제자의 번호를 알아내서는 시인으로 등단한 것을 축하한다고 전화해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 때도 선생님의 그런 애정을 철딱서니 없이 그저 당연하게 받아 넘겼다.

그런데 몇 년 후 갑작스레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 교수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놀랍고 안타까웠지만 고향에 있어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다시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국문과 제자들의 모금으로 제작한 시비 제막식이 학교 교정에서 열렸는데 그때야 참석할 수 있었다.

내가 교수님의 자상함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된 것은 시비 제막식 3년 후에 있었던 시상식과 제삿날이었다.

서울 사는 친구들로부터 '교수님이 고인이시지만 동국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 선후배 몇 명과 함께 동국대학교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해 교수님 사모님과 큰아들,딸과도 인사를 나누게 됐다.

시상식에 참석한 게 계기가 돼 3년동안 절에서 모시던 교수님 제사를 처음으로 집에서 지내게 됐다는 소식도 듣게 됐고 나는 그 제사에 참석했다.

대학동기들과 함께 교수님 댁에 도착해보니 사모님과 사모님의 친정어머님,아들 딸 네 사람이 오붓하게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다.

집에서 지내는 첫 제사를 정성스럽게 마치고 교수님 댁을 나서는데,사모님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우리들에게 너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같이 제사에 참석했던 제자들도 목이 메어 인사만 하고 나왔다.

살아계셨을 때보다 오히려 고인이 되어서야 나는 교수님과 진지한 만남을 갖게 됐으니 참으로 특이한 인연이다.

왜 인간이란 항상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닫고 후회하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남을 배려하고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귀중한 깨달음을 고인이 되어서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시어머니 교수님.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들 가슴 속에 사시면서 어렵거나 힘이 들 때 나타나 잔소리를 해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