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산업은행(KDB) 본점 8층.김창록 총재 집무실 책상에는 산은의 정체성 확립 방안과 관련된 보고서들이 가득 쌓여 있다.

"지난해 말 취임 이후 틈나는 대로 읽는다"는 게 김 총재의 얘기다.

1960~70년대 경제개발 초 기업들에 대한 장기 설비투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산업은행.하지만 1980년대 이후 정책금융업무가 줄어들면서 '개발은행(Development Bank)'이란 역할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영위기에 몰렸던 산업은행이 민간부문에 진출하면서 "국책은행이 민간 분야를 잡아먹는다"는 시중은행이나 증권사들의 '원성'을 높이 산 것도 사실이다.

산은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일본흥업은행(IBJ)이 2001년 미즈호금융그룹으로 흡수됐다는 점에서도 산은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피하기 힘들어졌다.

물론 산업은행의 정체성 고민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산은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비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를 것"이라는 게 금융계 안팎의 중론이다.

특히 최근 발생한 현대차그룹 부실채무탕감 관련 비리는 산은의 정체성 확립 논란을 재점화하는 계기가 됐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현대차그룹 부실채무 탕감비리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시장에 뛰어드는 등 산은의 역할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인 사건"이라며 "이번 기회에 산은의 업무영역을 확실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최근 주변 상황도 이젠 산은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우선 당장 오는 25일로 예정된 국회 업무보고에서 산은의 중·장기 발전방향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지난해 '산은이 인수할 수 있는 회사채를 투기등급 이하로 제한하고 대우증권 등 금융자회사를 5년 이내에 매각한다'는 내용의 산은법 개정안을 제출했던 김양수 한나라당 의원 등이 요구한 건이다.

산은도 정체성 재정립 방안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연구원에 국책은행의 모든 조직과 기능을 점검하는 중·장기 발전방안 컨설팅을 의뢰해 놓은 상황이다.

올 하반기에는 결과가 나온다.

물론 산은 스스로도 정체성을 찾으려는 자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 총재는 최근 △금융공학을 이용한 파생금융시장 △컨설팅과 프로젝트파이낸싱(PF)기법을 접목한 지역개발사업 △개발투자펀드를 활용한 에너지와 자원개발 등 국제금융시장 진입 △금융산업의 전략부문으로 부상한 퇴직연금과 자산운용 강화 등을 앞으로 산은이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할 '블루오션'으로 지목한 바 있다.

이달부터 이들 분야에 대한 조직개편을 시작해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기도 하다.

김 총재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은은 거대한 '항공모함'이다.

방향을 선회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물론 방향은 아직 안개 속이다.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산은의 앞날은 분명 지금과 다른 모습일 것이고,그 변화의 출발점은 바로 지금이라는 게 금융계 안팎의 공통된 시각이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