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학 < 산업부 차장 >

#1. 3년 전 이맘때인 2003년 4월.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두 달 뒤 재계는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SK그룹이 분식회계 혐의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고 일주일 만에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됐다.

재계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기자는 당시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만나러 새벽 길을 나섰다.

박 회장은 3년 임기의 대한상의 회장에 재선출된 뒤였다.

'재계의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그는 기자회견장이나 행사장에서 '닫혀진 입'이었다.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산자부 장관과 경제5단체장 간 조찬간담회를 마친 박 회장이 승용차에 오르자함께 탔다.

"회장님,재계로선 요즘 할 말이 많을 텐데요." 기자의 질문에 박 회장은 "허허,우리 두산 식구들이 '회장님,회사가 다칠 수 있으니까 제발 쓴소리 좀 그만하세요'하고 말려서…."

그래도 정권교체기에 하고 싶은 얘기를 못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안 쓸거지?"하면서(실은 쓸 걸 눈치채고) 특유의 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SK㈜가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는데 M&A(기업 인수·합병)제도상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 조항을 없애야 한다는 등 현안에 대해 주장을 쏟아냈다.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부터 재계를 대변해 쓴소리를 많이 해온 그도 지난해 말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다시 입을 닫아야 했다.

물론 그도 참여정부에 대해 좌파라는 표현을 절대 쓰지 않는 등 언제나 쓴소리만 한 것은 아니었다.

#2. 2006년 4월.현대자동차그룹이 비자금 조성혐의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고 오너 경영진이 언제 검찰에 소환될지 모르는 상황.

"털어서 먼지 안나올 기업이 어디 있겠어요.

이런 때 괜한 말 했다가 미운 털 박히면 큰일 나요."

요즘 현대차 수사를 어떻게 보느냐고 재계에 물어보면 대개 듣는 말이다.

현대차는 형사사건이니 그렇다고 치자.하지만 참여연대의 기업대상 후원회 모금활동이나 재벌 주식거래발표 등에 대해서도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의 등은 꿀먹은 벙어리다.

회비를 내는 기업들이 불만을 털어놓는데도 반박보도자료는커녕 대응논리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참여정부와 참여연대처럼 '참여'라는 말만 들으면 자라목처럼 들어간다.

#3. 그렇다면 재계에서 '쓴소리'가 왜 사라지고 있을까.

국민의 정부때 재계의 '싸움닭'역할을 했던 전경련 경총 등의 간부들은 늘 청와대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시달렸다.

이런 분위기는 참여정부 들어서도 이어졌다.

몇 년간 재계 사람들은 '정부에 대들어봤자 득될 게 없다'는 학습효과를 얻기에 이르렀다.

요즘 경제단체 수장을 맡은 이들의 개인 스타일도 예전과는 딴판이다.

전국 상공인을 대표해 자리에 오른 대한상의 회장은 "목소리를 높여 불필요한 긴장관계를 만들기보다는 정부와 협력해 재계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겠다"고 말한다.

온건한 인물위주로 짜여진 전경련 수뇌부도 정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유화 전략을 쓰고있다.

재계에서 쓴소리를 하는 이들이 없어지면서 벙어리 냉가슴 앓는 기업들의 속병이 깊어지고 있다.